[한국도자기 왜 이러나] 청와대 사랑 받은 도자기의 추락… 김동수의 ‘무차입경영’ 틈새 벌어질때 예견

입력 2015-07-0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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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경영 험로 ‘지분승계 미완성ㆍ초라한 성적표’

▲한국도자기 창업주 고(故) 김종호 회장 가족사진.(한국도자기 홈페이지)

‘창업(創業)보다 수성(守城)이 더 어렵다’라는 말이 한국도자기에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국내 1위 도자기업체 한국도자기가 창립 72년만에 공장 가동을 전면 중단했다. 적자의 눈덩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공단 중단이란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이다. ‘무차입경영’원칙을 줄곧 내세웠던 김동수(79) 한국도자기 회장의 원칙에 틈새가 벌어질때 이는 이미 예견된 일이라는 게 업계 분석이다.

▲고 육영수 여사가 직접 제안한 초롱꽃 디자인 제품.(사진제공 한국도자기)

◇무차입ㆍ무감원의 경영 원칙과 ‘황실장미 홈세트’로 혁신… 한국도자기의 역사는 19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청북도 청주의 작은 공장에서 막그릇을 만들던 한국도자기가 국내 1위·세계 5위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창업초기부터 다져온 무차입과 무감원 원칙이 밑바탕이 됐다.

1950년대 김 회장의 부친인 창업주 고(故) 김종호 회장은 창업초기 1950년대 자고 나면 돌아오는 빛 독촉에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창업 초기 매출의 30%가량이 이자로 나갈 정도였다. 당시 직원들은 “지금 당장 빛을 모두 갚을 수 있다면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라는 기도를 매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의 ‘기업사채동결’ 긴급명령에도 끝까지 약속된 일자에 빚을 상환했다. 한국도자기의 무차입경영은 이때부터 ‘몸’으로 겪은 경험에 바탕을 둔다.

김 회장은 1974년 한국도자기 사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경영을 진두지휘할때 ‘실질 부채비율 0%’를 만들기에 집중했다.1980년대 기업들이 은행 돈을 못 꿔서 안달일 땐 이상한 경영자로 손가락질받을때도 그는 이 같은 고집을 꺽지 않았다. 그가 또 고집하는 것은 무감원경영 원칙이다.

한국도자기에 무감원경영 원칙이 적용된 것은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주 공장에서 불이 났는데 직원들은 너도나도 뛰어올라 드럼통을 끌어내리려 애를 썼다. 김 회장이 뜯어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값비싼 백토가 아까웠다”라는 직원들의 말이 귓가에 맴돈 김 회장은 이후 머릿속에서 감원이란 말을 지워버렸다. 이 회사는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경영위기 등을 겪으면서도 직원을 한 명도 내보내지 않았다.

한국도자기가 업계에서 일대 혁신을 몰과 왔다는 평가를 받으며 주목을 받은 것은 1968년 ‘황실장미 홈세트’를 출시하면서부터다. 한국도자기는 황실장미의 폭발적 인기를 바탕으로 단숨에 스타 기업으로 등극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도자기는 전국에 대리점망을 확충하고 물량을 맞추기 위해 첨단의 자동화 설비를 들이는 등 유통과 기술, 마케팅에서 한 단계 도약하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김동수 한국도자기 회장과 고 암드레김이 지난 2010년 컬래버레이션 행사를 마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 한국도자기)

◇청와대의 부름, 본차이나 개발 ‘도약의 기회’= 무차입·무감원경영 원칙과 황실장미 홈세트로 기본을 다진 한국도자기의 역사는 ‘도자기의 여왕’이라 불리우는 본차이나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1973년 김 회장은 청와대 호출을 받았다.

갑작스런 부름에 놀라 달려간 김 회장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로부터 “청와대에서 자신있게 국빈에게 내놓을 한국산 본차이나 도자기를 생산해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당시에는 국내에 본차이나 기술이 없어 모두 외국제품을 쓰고 있었다.

한국도자기는 수천번의 실험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젓소뼈를 50% 이상 함유한 본차이나 도자기 개발에 성공했다. 본차이나란 동물의 뼈를 재로 만든 본애쉬(Bone ash)를 첨가해만든 자기로 나라마다 본차이나라는 이름을 명기할 수 있는 기준을 본애쉬 함유량으로 정하게 되는데 영국에서는 최소한 30% 함유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한국도자기와 행남자기의 본차이나 도자기엔 50% 본애쉬가 함유돼 있다. 한국도자기는 본차이나를 중심으로 한때 세계 도자기업체 중 생산량 1위를 기록할 정도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한국도자기를 방문해 제품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사진제공 한국도자기)

◇승계 잡음 이어져… 외국 브랜드와 중국산 브랜드의 공세에 밀려= 승승장구했던 한국도자기는 2000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삐걱대기 시작했다. 우선 기업 승계와 관련해서 가족 내 잡음이 일어났다. 김동수 한국도자기 회장이 경영권을 2004년 장남인 김영신(53) 사장에게 물려주자 김동수 회장의 동생인 김성수씨는 2005년 한국도자기의 인도네시아 공장을 들고 분사해 ‘젠(ZEN)한국’을 설립했다. 이후 양사는 “유사상품, 디자인, 모양 등에 현혹되지 말라”고 으르렁대며 서로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2002년 이후 영업이익은 단 한 해를 제외하고 10억원을 밑돌았고, 매출은 500억원 안팎에서 정체 양상을 보였다. 급기야 지난 2010년에는 44억원에 달하는 영업손실을 기록해 사상 최대의 적자폭을 보였다. 순손실 규모도 25억원으로 2005년 이후 5년만에 적자로 전환됐다. 외국 유명 브랜드와 저가 중국산의 틈바구니에서 원부자재 가격 및 인건비 상승, 중동지역 대규모 수주 취소 등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 2011년에도 초라한 성적은 이어졌다. 매출 489억원에 영업이익은 4000만원. 순이익도 5억원 정도를 달성했다.

김 회장의 무차입경영 원칙에 틈새가 생긴것도 이때다. 2010년 한국도자기의 현금성 자산은 전년대비 13억원 감소해 10억원 수준에 그쳤고, 부채비율은 2.9%포인트 상승해 35.6%를 기록했다. 2011년 흑자전환에 성공했지만, 오히려 총차입금은 10억원 넘게 늘면서 47억원을 기록했다. 현금성자산 6억원을 제외한 순차입금도 40억원을 넘어섰다.

(이투데이)

이후 한국도자기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한국도자기 매출액은 2011년 489억원, 2012년 465억원, 2013년 404억원, 2014년 384억원 등 매년 감소했다. 당기순손실 규모도 2013년 35억3400만원에서 2014년 104억7200만원을 기록해 1년 사이 3배 가까이 늘었다.

김 사장은 이 위기를 디자인과 기능성 강화를 통한 제품 고급화로 돌파해 매출 1500억원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목표까지 세웠으나 불황의 그림자를 피하지 못했다.

▲김영신 한국도자기 대표이사 사장이 서울 신설동 본사에서 프라우나를 들어보이고 있다.(사진제공 한국도자기)

◇한국도자기 만큼 아픈 손가락 한도관광= 한도그룹은 김 회장의 자년들이 분할 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한도그룹의 중심 한국도자기와 한도관광은 장남 영신씨가 맡고 있다. 한국도자기리빙은 김 회장의 차남 영목(51) 씨가 대표로서 경영일선에 있다. 김 대표는 한국도자기 부사장직도 겸하고 있다.

김 회장의 딸 영은(48) 씨는 지난 2004년부터 한국도자기특판(옛 세인트제임스)의 대표를 맡고 있다. 한도특판은 서울 연희본점, 청계8가점, 종로점 등을 두고 있는 한국도자기 유통업체다. 김영신 대표의 부인 이난옥(53)씨는 지난 1999년부터 서울 청담 본점을 비롯, 분당 정자점, 힐튼점 등을 운영하는 유통업체 한국본차이나의 대표를 맡고 있다.

수안보파크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한도관광도 한국도자기만큼 성적표가 초라하다. 2007년 이후 영업손실이 이어지고 있다. 순이익은 2005년 이후 적자 행진이다. 지난해에는 매출이 26억원에 불과했고, 영업손실액은 2억원에 달했다. 적자 기조가 수년간 지속되면서 재무구조도 점차 약화되고 있다. 현금성 자산은 거의 제로(0) 상태인 가운데 차입규모는 60억원을 웃돌고 있다.

한도그룹의 3세 경영자들의 경영 승계는 이뤄졌지만 지분 승계는 아직 미완성이다. 한국도자기의 주주 구성을 보면 김동수 회장이 최대주주로서 31.2%를 소유하고 있으며, 한도관광 역시 김 회장이 최대주주로 30%를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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