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을 빌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올해의 수확만큼 내년의 약속이 중요하다. 흙을 살리고 물길을 정비하는 데 들인 돈과 시간은 한 번의 수확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내년에도 같은 밭에 씨앗을 뿌릴 수 있어야 투자하고, 작물을 바꾸고, 농사의 규모를 키울 수 있다. 농지 정상화가 임차농에게 건네야 할 안심은 바로 이 ‘다음 농사’에 있다.
정부가 내놓은 농지 전수조사 후속 대책은 농촌의 현실을 제도 안으로 끌어안으려는 시도다. 투기와 중대한 불법 전용에는 엄정하게 대응하되, 관행적인 임대차 등은 해당 농지를 농지은행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정상화의 길을 열겠다는 것이다. 처분 유예와 양성화의 근거를 담은 특별법 제정도 추진한다.
고령으로 농사짓기 어려워진 사람과 부모의 땅을 물려받은 사람에게 농지는 쉽게 정리할 수 있는 재산이 아니다. 이웃에게 경작을 맡겨 땅이 묵지 않도록 해온 사정도 있다. 이런 현실을 살피고 합법적으로 이용할 통로를 마련하는 것은 필요한 접근이다. 농지 소유자의 불안을 덜어줘야 관행적인 임대차도 제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함께 살펴야 할 사람이 실제로 농사를 짓는 임차농이다. 같은 땅을 두고 소유자는 계속 보유할 수 있는지를, 경작자는 계속 일할 수 있는지를 묻게 된다. 정부도 후속 계획에 농지은행이 해당 농지의 실경작자에게 우선 임대하고, 특별법 시행 이후 일정 기간 임차권을 보장하는 방안을 담았다. 소유와 경작을 함께 안정시키겠다는 출발점은 마련한 셈이다.
이제 관건은 농민이 안심하고 농사를 이어갈 수 있는 구체적인 계약 조건이다. 얼마 동안 농사지을 수 있는지, 임대료는 어떻게 정하고 조정하는지, 계약이 끝나면 어떤 조건으로 갱신하는지가 분명해야 한다. 소유자와 합의해 밭을 개량하거나 시설을 설치했다면 계약 종료 때 투자비를 어떻게 처리할지도 미리 정할 필요가 있다. ‘계속 농사지을 수 있다’는 설명에 이런 내용이 채워져야 농민도 다음 해에 무엇을 심고 얼마를 투자할지 계획할 수 있다.
임차농의 안정적인 경작을 위해서는 소유자의 정당한 권익도 함께 보장해야 한다. 임대료를 제때 받고, 맡긴 땅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알 수 있어야 장기 위탁을 선택하기 쉽다. 지역의 임대료 수준과 토지 여건을 반영한 기준을 공개하고 계약 내용을 양쪽에 충분히 설명하는 일이 중요하다. 농지은행이 소유자와 경작자 사이에서 예측 가능한 약속을 만들어준다면, 정상화는 일회성 정비를 넘어 안정적인 농지 이용 질서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기존 임차농의 경작을 지키면서 청년농에게 줄 땅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농지은행에 맡겨진 면적이 늘었다고 그만큼 새로 공급할 농지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미 누군가 경작하는 땅은 기존 농사를 이어갈 기반이다. 새로 진입할 청년농을 위해서는 매도 희망 농지의 매입과 유휴농지 정비 등을 통해 추가로 공급할 땅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위탁 면적을 발표할 때 기존 임차농의 경작을 안정시킨 면적과 신규 농업인에게 공급한 면적을 나눠 보여주면 정책의 성과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처럼 농지은행의 역할이 커지는 만큼 현장의 역량도 뒷받침돼야 한다. 계약을 안내하고 실제 경작을 확인하며 분쟁을 조정할 사람이 필요하다. 특히 소유관계가 복잡하거나 서류를 갖추기 어려운 농지일수록 상담과 행정 지원이 중요하다. 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확보하고 신청부터 계약까지의 절차를 쉽게 만드는 일이 법을 고치는 작업과 함께 가야 한다. 좋은 취지가 복잡한 서류 앞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농지 전수조사는 우리 농촌의 실제 모습을 들여다볼 기회다. 조사에서 확인한 사정을 제도에 반영하고 소유자와 경작자가 함께 안심하도록 한다면, 농지 정상화는 농업의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특별법은 땅을 가진 사람에게는 합법적으로 맡길 길을,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오래 일할 기반을 마련해주는 약속이어야 한다. 내 땅이 아니어도 내 농사의 내일을 계획할 수 있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