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씩 잡아먹는 인허가…출발선부터 발목 [정비사업 병목 해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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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허가 막혀 '첫 삽'만 수년~십수년
500가구 이상 사업 279곳 중 착공 24곳뿐

서울에서 정비사업을 통해 공급이 예정된 주택은 수십만 가구에 달하지만 실제 착공까지 이어진 물량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정비구역 지정부터 조합설립, 사업시행인가까지 여러 행정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사업이 수년씩 멈춰 서기 때문이다. 정부가 주택 공급 확대에 속도를 내더라도 기존 정비사업의 인허가 병목을 풀지 못하면 공급 시점을 앞당기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2일 서울시 정비사업 정보몽땅의 올해 3월 정비사업 통계를 보면 500가구 이상 공급이 예정된 서울 정비사업지는 279곳으로, 계획된 공급 물량만 45만1061가구다. 하지만 실제 착공 단계에 들어선 곳은 24곳, 3만7707가구에 불과하다. 전체 사업장의 8.6%, 공급 예정 물량의 8.4%만 공사에 들어간 셈이다. 나머지 255곳, 41만3354가구는 착공 이전 단계에 머물러 있다.

착공 전 사업지를 단계별로 보면 조합설립 단계가 91곳(15만8751가구)으로 가장 많다. 구역지정 단계도 30곳(5만6815가구), 추진위원회 단계는 32곳(4만6859가구)에 달한다. 사업시행 단계에는 41곳(5만5820가구), 관리처분 단계에는 39곳(5만4415가구)이 머물러 있다. 건축심의 단계도 22곳(4만694가구)이다. 착공 전 사업지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업시행인가 이전 단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상당수 정비사업이 본격적인 공사에 진입하기 전 정비구역 지정과 인허가 단계에서 지연되는 배경에는 복잡한 규제와 유관 부서 간 '핑퐁 행정'이 있다. 여기에 지자체장의 정책 기조 변화와 담당 부서의 소극적인 행정, 사안별로 달라지는 판단 기준 등도 사업 기간을 늘리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최근 더불어민주당과 대한건축학회가 개최한 '서울 주택가격 안정을 위한 정비사업 활성화 방안' 토론회에서도 서울시와 자치구 등 관계 부서 간 이견이 사업을 지연하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영등포구의 한 재건축 사업장에서는 공공보행통로 설치를 둘러싼 부서 간 견해차로 인허가가 약 2개월 늦어진 사례도 제시됐다.

서울 강남 재건축의 대명사인 은마아파트는 2003년 추진위 승인 후 정비구역 지정과 조합설립까지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행정 절차에 바쳐야 했다. 송파구 헬리오시티(가락시영) 역시 용도 변경 갈등으로 구역 지정 후 관리처분인가까지 8년 넘게 걸렸고, 서초구 래미안 원베일리(신반포3차)도 인허가 지연으로 착공까지 17년이 소요됐다. 실제 공사 기간은 3년 안팎이었다.

지방선거 이후 지자체장이 교체되면서 전임 구청장의 정비사업 추진 방식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사업이 멈춰 서는 일도 적지않다. 서울 서대문구 유진상가·인왕시장 일대 재개발 사업이 대표적이다. 애초 전임 구청장이 전국 최초로 '구청 직접 시행' 카드를 꺼내며 갈등을 풀고 사업 속도를 내려 했으나, 6·3 지방선거로 신임 구청장이 들어서면서 기조가 바뀌었다. 서대문구청 측은 "주민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는 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태스크포스(TF)를 발족해 개발 방식을 재상의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주민 의견 수렴 절차로 돌아가면서 사업 일정 지연이 불가피해졌다.

정비구역 지정과 인허가가 기약 없이 미뤄지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사업자와 조합원, 나아가 국민의 주거비 부담으로 돌아간다. 착공 전 단계가 길어질수록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그사이 치솟은 원자재 가격과 공사비는 분양가 상승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따르면 6월 건설공사비지수는 138.22(잠정치)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지자체가 추진 중인 통합심의 등의 제도가 실질적인 공급 단축으로 이어지려면 개별 법령 개정을 통한 법적 연동과 자치구 단위의 병목 해소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신보연 세종대 부동산AI융합학과 교수는 "서울시가 주도하는 정비구역 지정과 통합심의는 빨라졌지만, 조합설립·사업시행·관리처분인가 등 대부분의 행정을 담당하는 자치구 단계에서 반복적인 보완 요구와 부서 간 이견 조율로 병목이 발생하고 있다"며 "기한 내 미처리 시 자동 승인하는 '인허가 간주제'를 경미한 변경이나 통합심의 재상정에 우선 적용하고, 권리관계가 복잡한 단계는 기한 관리와 상급기관 조정 채널을 강제하는 '준강제' 장치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 교수는 이어 "현재의 통합심의는 창구만 하나일 뿐 개별 소관 법령에 따른 협의 기한이 별도로 작동해 사업시행인가까지 1.5~2년이 걸리는 한계가 있다"면서 "도시정비법뿐만 아니라 환경영향평가법, 교육환경보호법 등 개별법에 통합심의 일정과 협의 기한을 직접 연동시키는 특례 조항을 신설해야 실질적인 행정 기간 단축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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