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만난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타행 대비 실적이 저조하다는 지적에 대한 항변이지만, 동시에 ‘생산적 금융’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얘기다.
올해 금융권의 최대 화두는 생산적 금융이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금융지주는 향후 5년간 500조 원 이상의 자금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1분기에만 36조3000억 원이 집행되며 속도는 빠르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무엇이 생산적 금융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정책 목표와 현장의 인식 사이 간극이 작지 않다는 의미다.
가장 큰 문제는 공통 기준의 부재다. 은행마다 생산적 금융으로 인정하는 업종 범위가 제각각이다. 어떤 곳은 1000개에 달하는 업종을 포함하고, 다른 곳은 250개 수준으로 제한한다. 기준이 제각각이다 보니 실적 비교는 물론 검증도 쉽지 않다. 사실상 ‘깜깜이 통계’에 가깝다. 당국은 자율성을 이유로 일률적 기준 제시를 미루고 있지만, 그 사이 시장의 혼란은 커지고 있다. 평가 기준이 불명확하다 보니 내부 성과 관리 역시 ‘양적 확대’에 치우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틈을 타 기존 대출이 생산적 금융으로 포장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1분기 실적의 상당 부분이 기존 기업대출의 연장선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여전히 중소기업 대출이 부동산 담보 중심으로 이뤄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실질적 변화보다는 ‘이름 바꾸기’에 가까운 셈이다. 생산적 금융이라는 간판 아래 리스크가 낮은 익숙한 영업으로 회귀하는 모습이다.
양적 확대에 치우친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경쟁력을 상실한 한계기업으로 자금이 유입되며 사실상 생명 연장 수단으로 활용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동시에 중소법인 연체율은 1%를 넘어서는 등 건전성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연체율 상승은 향후 충당금 확대와 수익성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부담이다. 정작 자금이 필요한 혁신기업이나 벤처기업으로의 흐름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정책 간 충돌도 현장의 부담을 키운다. 혁신기업 대출을 늘리면 위험가중자산(RWA)이 증가하고, 이는 보통주자본비율(CET1) 하락으로 이어진다. 반면 정부는 밸류업 정책을 통해 주주환원을 확대하라고 주문한다. 생산적 금융을 확대할수록 자본비율은 떨어지고, 주주환원을 늘릴수록 혁신 자금 공급 여력은 줄어드는 구조다. 은행 입장에서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어려운 구조적 딜레마다. 중장기적으로는 자본규제 체계와 정책 목표 간 정합성을 맞추는 작업이 불가피하다.
생산적 금융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은행의 심사 역량 강화와 제도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 담보 중심에서 벗어나 기술력과 사업성을 평가할 수 있는 전문 인력과 시스템이 필요하다. 단순 대출을 넘어 투자와 결합한 금융 모델도 확대해야 한다. 동시에 성과를 ‘공급 규모’가 아니라 ‘혁신 성과’로 평가하는 체계 전환도 검토할 시점이다.
현장에서는 면책 제도의 정비를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는다. 사후 부실에 대한 책임 부담이 큰 구조에서는 적극적인 자금 공급이 어렵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경영판단원칙과 함께 위험을 분담할 수 있는 정책적 장치가 필요하다. 위험가중치 조정이나 정책금융기관의 부분 보증 등도 검토할 만하다.
생산적 금융의 핵심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단기간에 대규모 자금을 집행하는 데 집중할 경우 또 다른 부실을 키울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명확한 기준과 정교한 리스크 관리 체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