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법, 왜 기름값 카드 됐나…트럼프가 꺼낸 'DPA' 정체 [이슈크래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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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기름값이 오르면 사람들은 먼저 산유국을 떠올립니다. 중동 정세가 어떤지, 원유가 얼마나 나오는지부터 보게 되죠. 그런데 미국 백악관이 20일(현지시간) 꺼낸 카드는 조금 달랐습니다. 유가를 법으로 직접 누르겠다고 하기보다, 석유를 더 뽑고 더 정제하고 더 빨리 옮길 수 있게 하겠다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그 근거로 꺼낸 법이 국방물자생산법(DPA)입니다. 이름만 들으면 군대 이야기 같지만, 이번에는 기름 문제에 이 오래된 법이 다시 등장한 겁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날 대통령 각서에서 "국내 석유 생산·정제·물류 역량의 회복력 확보"가 미국의 국방 대비 태세에 핵심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날 로이터통신도 이번 조치를 연료값 상승 압박에 대응하려는 조치로 전했습니다.

기름값을 직접 누르기보다, 공급을 늘리는 카드

▲국방물자생산법(DPA) 관련 대통령 각서. (출처=미국 백악관 홈페이지 캡처)

여기서 먼저 짚어야 할 게 있습니다. 이번 DPA 카드는 가격표를 직접 붙드는 방식이 아닙니다. 백악관이 이날 공개한 석유 관련 대통령 각서를 보면, 초점은 주유소 전광판이 아니라 생산설비와 물류망에 맞춰져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석유가 군과 산업기반, 핵심 인프라를 움직이는 자산인 만큼 공급이 흔들리면 안보도 흔들린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미 에너지부가 필요한 구매와 구매 약정, 금융 지원 수단을 동원해 관련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날 나온 조치도 석유 한 건만이 아니었습니다. 전력망 장비와 공급망, 대규모 에너지 인프라, 천연가스와 액화천연가스(LNG) 설비, 석탄 공급망과 기저전원 발전능력까지 DPA 303조 각서 5건이 한꺼번에 올라왔습니다. 석유만 따로 본 것이 아니라, 에너지 체계 전체를 안보 문제로 묶은 셈입니다.

즉, 이번 조치는 "기름값을 법으로 직접 잡겠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미국 정부는 주유소 가격표를 누르기보다, 그 가격을 밀어 올리는 공급 부족부터 손보겠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석유가 모자라면 군과 산업, 핵심 인프라가 함께 흔들릴 수 있다고 보고 생산·정제·저장·운송의 막힌 지점을 연방 권한과 자금으로 풀겠다는 뜻이죠. 그래서 이번 카드가 겨눈 곳도 가격표 자체보다 정유소와 저장시설, 송유관, 항만 같은 인프라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유가 대응이 목적이라면, 수단은 가격 통제가 아니라 공급 확대인 셈입니다.

원래는 전쟁 물자를 먼저 만들기 위한 법이었다

▲군인들이 물자를 옮기고 있다. (출처=미 연방재난관리청(FEMA) 홈페이지 캡처)

DPA는 원래 훨씬 더 강한 법이었습니다. 1950년 9월 8일 제정된 원문을 보면 성격이 분명합니다. 물자와 시설의 우선 배정, 징발, 생산능력 확대 지원은 물론이고 가격·임금 안정, 노동분쟁 해결 등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군수물자를 제때 만들고 보내기 위해 미 대통령에게 광범위한 경제 동원 권한을 준 법이었던 겁니다. 철강, 구리, 알루미늄 같은 부족한 자재를 군수 생산에 먼저 돌리고, 민간 주문 순서도 바꿀 수 있게 한 장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법의 성격은 달라졌습니다. 미 연방재난관리청(FEMA)과 회계감사원(GAO)에 따르면, 지금 실질적으로 남아 있는 DPA의 축은 세 갈래입니다. 기업에 국가안보 관련 계약을 먼저 처리하라고 할 수 있는 'Title I', 핵심 물자의 생산 능력을 키우기 위해 투자와 대출, 구매 약정 같은 지원을 넣을 수 있는 'Title III', 민간 업계 협력을 위한 자율협약과 자문기구 등을 담은 'Title VII'입니다. 한때는 전시 경제를 폭넓게 통제하는 법이었다면, 지금은 전략산업을 밀고 공급망 병목을 푸는 비상 산업정책 도구에 더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때 이 법이 다시 자주 불린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GAO의 코로나19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연방정부는 DPA 권한을 활용해 관련 주문에 우선권을 주고, 국내 공급 확대 사업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민간 기업 협력도 강화했습니다. DPA가 더는 전쟁 때만 꺼내는 법이 아니라, 공급망이 흔들릴 때 정부가 산업 현장에 직접 손을 넣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일쇼크 뒤엔 '전쟁법'이 에너지법처럼 쓰였다

▲호르무즈 해협 인근 걸프만 해상에 정박한 화물선. (로이터연합뉴스)

DPA가 에너지와 본격적으로 연결된 건 1970년대였습니다. GAO 자료를 보면, 1974년 트랜스알래스카 송유관 사업은 DPA 우선권을 적용받아 필요한 품목의 납기를 앞당겼습니다. 다른 주문보다 먼저 물건을 받을 수 있게 해 공사를 밀어붙인 겁니다. 전쟁 물자를 먼저 만들라고 만든 법이, 석유 인프라 공사를 앞당기는 데 쓰인 셈입니다. 이 무렵부터 미국에선 "에너지 안보가 곧 국가안보"라는 논리가 더 뚜렷해졌습니다. 에너지가 부족하면 군도, 공장도, 전력망도 흔들린다는 판단이 제도에 들어온 셈입니다.

즉, 트럼프 대통령이 석유 생산·정제·물류 능력을 두고 DPA 303조를 꺼낸 건 완전히 뜬금없는 장면은 아닙니다. 다만 이번 조치의 정치적 출발점은 분명합니다. 유가 상승 압박에 대응해야 했고, 그 수단으로 미국식 공급 확대 카드를 꺼낸 겁니다. 한국전쟁 직후 만든 법으로 기름값을 직접 묶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석유와 정유, 운송, 저장 인프라를 안보 문제로 다시 묶고 연방 권한과 자금을 밀어 넣겠다고 한 것이죠. 한마디로, 트럼프가 꺼낸 DPA 카드는 "가격부터 누르겠다"는 카드가 아니라 "기름이 오가는 길부터 넓히겠다"는 카드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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