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상 결정마다 ‘충실의무’ 적용 무리

상법 개정 이후 기업의 지방 이전을 둘러싼 ‘배임 리스크’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국가 균형 발전과 주주 이익 보호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경영 판단이 법적 책임 문제로 이어지면서 기업의 의사결정 전반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모습이다. HMM 사례처럼 본사 이전을 둘러싼 의사결정이 곧바로 주주 이익 침해 여부로 연결되면서 경영 활동 전반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재계 전반으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HMM 본사의 부산 이전은 정부의 지방 균형 발전 기조 아래 추진돼 온 사안이다. 해양수산부 역시 산하 공공기관과 해운기업의 부산 이전을 지원하기 위해 ‘이전 기업 지원 협의체(TF)’를 운영하는 등 정책적 뒷받침에 나서고 있다. 일각에서는 지방선거를 의식한 정책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지만, 수도권 집중 완화라는 장기적 정책 흐름 속에서 추진되는 사업이라는 측면도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정책적 결정이 상법 개정안과 맞물리며 법적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HMM 육상노조는 본사 이전이 단기적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배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나아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주주로 확대된 상법 개정안 취지에 비춰볼 때 주주 이익을 침해하는 결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손해배상 책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경영진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관련 업계에서는 이번 사례를 계기로 경영상 판단이 사법 영역으로 빠르게 편입되는 ‘경영의 사법화’가 가속화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본사 이전처럼 장기적으로 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결정이라 하더라도 단기적인 비용 증가나 인력 유출을 이유로 주주 이익 침해로 문제 삼을 경우 이사회는 법적 책임 방어에 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본사를 부산으로 이전할 경우 일시적으로 손해가 발생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이익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며 “손해 여부 자체도 판단이 쉽지 않은 사안인데 이를 배임으로 연결하면 경영진 입장에서는 사실상 어떤 의사결정도 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본사 위치 결정은 본질적으로 경영상 판단의 영역으로 봐야 하는데 주주가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서 이를 충실의무 위반으로 일률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상법 개정안 시행 이후 이사회 내부 의사결정 과정이 위축되는 사례도 전해진다. 한 회사에서는 사외이사들이 충실의무 위반 논란을 의식해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한다. 경영진 안건에 동조할 경우 주주 이익 침해로 공격받을 수 있고, 반대로 경영진의 판단에 반대할 경우 이사회와 경영진 간 관계 때문에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못 하고 방어적이고 안전한 선택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기업에서는 사외이사를 상대로 주주가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회사의 결정으로 주주 손실이 발생했을 때 해당 안건에 찬성한 이사를 상대로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문제를 제기하는 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