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K팝 앨범을 보면, 이게 정말 '음반'이 맞나 싶은 순간이 적지 않습니다.
앨범을 언박싱하는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CD가 아닌 인형을 꺼내고, 키링을 가방에 달고, 심지어는 명상 혹은 마사지 도구(?)를 꺼내 드는 경우도 있죠. 종류도 다양한 머천다이즈(MD)가 앨범의 핵심 구성품으로 자리 잡은 겁니다.
최근 잇따라 등장한 이색적인 앨범들은 K팝이 이제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를 넘어 '어떤 형태로 남길 것인가'를 고민 중이라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1일 빌리프랩에 따르면 그룹 아일릿(ILLIT)은 30일 미니 4집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를 발매합니다.
신보에는 타이틀곡 '잇츠 미(It’s Me)'를 포함해 'GRWM (Get Ready With Me)', '파우, 파우!(paw, paw!)’,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 '러브, 올더 유(Love, older you)' 등 총 5곡이 실리는데요. 그 가운데 타이틀곡인 '잇츠 미'는 첫 데이트 이후 좋아하는 상대와 관계 정의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찰나, “너의 최애는 바로 나야!”라고 당돌하게 외치는 노래입니다. 싱글 1집 타이틀곡 '낫 큐트 애니모어(NOT CUTE ANYMORE)'에서 독특한 가사로 아일릿 특유의 엉뚱 발랄함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싱어송라이터 유라(youra)와 더 딥(The Deep)이 작사에 참여, 아일릿의 당찬 매력을 극대화하죠.
'아일릿 코어'는 신곡에만 그치지 않을 예정입니다. 이번 앨범은 일반반과 파우 파우 버전, 위버스 버전, 괄사 세라믹 오브제 버전 등으로 발매되는데요. 이 중 괄사 세라믹 오브제 버전이 남다른 구성으로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이 머치반은 마사지 도구인 '괄사'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 오브제를 중심으로 파우치, 미니 CD, 가사지, 포토카드(포카) 등으로 이뤄졌습니다. 괄사의 기능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아일릿 특유의 키치하고 발랄한 감성을 반영했는데요. 신보 수록곡 'GRWM (Get Ready With Me)'의 '준비하는 순간'이라는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며 셀프 케어 루틴을 연상케 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에 강아지 실루엣 디자인을 입혀 반려동물을 테마로 한 또 다른 수록곡 '파우, 파우!'의 분위기도 함께 담아내려 했죠.
아일릿의 앨범이 화제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해 6월 미니 3집 '밤(bomb)'에서는 인이어 이어폰 머치 버전을, 같은 해 11월 발매한 첫 번째 싱글 '낫 큐트 애니모어(NOT CUTE ANYMORE)'에서는 국내 캐릭터 '리틀 미미(Little Mimi)' 키링 체인 인형 머치반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 유선 이어폰과 인형 키링을 트렌디한 패션 아이템으로 사용하는 잘파 세대의 수요를 제대로 겨냥했는데요. 팬덤을 넘어 입소문이 나는 바람에(?) 물량이 빠르게 소진, 추가 제작이 이뤄지기도 했죠.
그런가 하면 우즈는 지난달 4일 발매한 첫 정규 앨범 '아카이브. 1(Archive. 1)'을 쥬얼, 메인, 키 버전 등으로 선보였는데요. 키 버전은 묵직한 자동차 리모트 키, 기타 피크, 피크 홀더로 이뤄진 키 참과 QR 카드, 포토카드로 구성돼 이목을 끌었습니다. 타이틀곡 중 하나 '휴먼 익스팅션(Human Extinction)' 속 '질주' 이미지를 고스란히 반영한 오브제인데요. 디자이너 스튜디오 바이스(STUDIO V1C3)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첫 정규 앨범인 만큼 작품의 서사를 실재하는 사물로 구현하는 데 디자인의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하기도 했죠.
지난달 30일 미니 1집을 발매하고 약 4년 만에 솔로 아티스트로 돌아온 밴드 데이식스(DAY6) 원필도 특별한 버전으로 팬들의 취향을 저격했는데요. 북 파우치 버전에는 패브릭 북 파우치를 비롯해 연필, 포토북, CD, 포토카드, 필름 포토, 엽서, 드로잉 스티커가 구성품으로 담겼습니다. 이에 앞서 데이식스는 정규 4집 '더 데케이드(The DECADE)'를 인이어 이어폰 버전으로도 선보여 화제를 모은 바 있습니다. 멤버별로 디자인이 다른 데다가, 특히 원필 버전의 인이어 이어폰은 실제 원필이 무대 위에서 착용하는 인이어와 유사한 디자인이라 팬들의 관심을 끌었죠.
다음 달 6일 미니 4집 '마이 퍼스트 킥(My First Kick)'으로 컴백하는 킥플립(KickFlip)은 리미티드 버전에 미니 디지털 카메라를 포함했는데요. 발매를 앞두고 공개된 티저와 콘셉트 포토에서는 베개 싸움을 하며 천진난만한 매력을 드러내는가 하면,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등 싱그러운 청춘을 만끽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담긴 바 있습니다. 이 이미지를 앨범으로도 연속해 선보이면서 킥플립만의 청춘을 강조할 예정이죠.

이 같은 흐름을 단순히 '아이디어 경쟁'으로만 보긴 어렵습니다. 음악을 담는 매체에서 출발한 앨범은 아티스트의 감각과 서사를 물성으로 구현하는 역할을 하고 있죠.
스트리밍 중심 시장에서 음악은 언제든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됐습니다. 기획사 입장에선 '굳이 돈을 내고 앨범을 사야 하는 이유'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인데요. 키링부터 괄사, 이어폰, 카메라, 패션 액세서리 등 일상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오브제를 앨범에 포함하는 것도 이 같은 고민의 결과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오브제는 아티스트의 무대를 일상으로 확장할 수도 있습니다. 방, 책상, 화장대 등 일상 공간에 아티스트의 흔적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증과 공유를 부르고, 자발적인 확산 효과를 형성할 수 있죠.
기획사 입장에서는 앨범 한 장당 수익을 높이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앨범 한 장이 지니는 가치와 가격을 끌어올리는 방향인데요. 오브제형 앨범은 디자인 상품이나 한정판 굿즈로 인식되면서 일반 음반보다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그만큼 한 번의 구매로 발생하는 매출 규모도 커지곤 하죠.
동시에 '소장 가치'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소비자의 심리적 장벽도 낮추고 있습니다. 특정 콘셉트와 연결된 오브제, 활동 기간에만 구매할 수 있는 한정판이라는 요소는 앨범을 단순 상품이 아닌 하나의 결과물로 인식하게 하는데요. 팬 입장에서도 '여러 장을 사야 하는 부담'이 아닌 '하나를 제대로 소장한다'는 명분이 생기는 셈입니다.
라인업을 세분화하는 전략도 병행됩니다. 비교적 접근성이 높은 일반 앨범과 함께 색다른 기획 버전을 동시에 출시해 선택지를 넓히는 방식인데요. 대표적인 사례가 세계적인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입니다. 그는 하나의 앨범을 수십 종의 피지컬 버전으로 선보이며 서로 다른 커버 아트나 보너스 트랙, 포스터 등으로 수집 욕구를 자극하고 있는데요. 가격 전략도 뚜렷하게 나뉩니다. 비교적 저렴한 CD나 디지털 앨범부터 한정판 컬러 바이닐이나 박스 세트 등 고가 제품까지 촘촘하게 구성해 소비층을 세분화하는 방식입니다. 라이트 팬과 코어 팬 모두를 아우르면서 결과적으로는 한 명의 소비자가 지출하는 금액을 자연스럽게 확대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차트 성적과 매출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효과를 낳죠.

이 같은 변화는 K팝에 국한한 흐름은 아닙니다. 미국 음악 시장에서는 특히 바이닐(LP)을 중심으로 한 전략이 두드러집니다.
미국음반산업협회(RIAA)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LP 매출은 10억4000만달러를 기록하며 1983년 이후 처음으로 10억달러를 돌파했습니다. 판매량 역시 CD를 크게 앞지르면서 피지컬 음반 시장의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죠.
흥미로운 건 미국의 LP 구매자 절반가량이 이를 재생할 수 있는 턴테이블을 갖고 있지 않다는 조사도 있다는 겁니다. 포브스는 2023년 루미네이트 보고서를 인용해 이 같이 전하면서 "음악 팬들이 바이닐을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음악을 물리적으로 소유하길 원하기 때문'"이라고 짚었는데요. 이들에게 LP는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일종의 굿즈, 팬심을 드러내는 상징물과 같다는 거죠. 시장조사업체 퓨처소스컨설팅이 지난해 9월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Z세대 LP 구매자 중 약 30%가 턴테이블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한국과 미국을 막론하고 앨범은 더 이상 '음악을 담는 매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음악을 듣는 경험을 넘어 어떻게 소장하고 소비할 것인지 함께 설계되는 상품으로 변화하고 있는데요.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피지컬 음반을 '소장 가치 있는 오브제'로 재정의하려는 흐름은 점점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