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호 빠지자 ‘기후본안’ 노리는 부처들… ESG 공시 우회 관치 논란

기사 듣기
00:00 / 00:00

농림부 등 S1·S2 ‘전략’ 섹션 내 정책 지표 삽입 물밑 작업 공시
데이터가 대출 금리 결정… 대통령 "재무적 페널티" 기조에 성과 경쟁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 최종안에서 정책 목적성 지표를 담은 별도 기준서(제101호)가 제외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자 일부 정부 부처들이 공시 본안에 정책 성과를 반영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기업이 의무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기후 공시 본안’을 통해 정책 목표를 우회적으로 관철하려는 시도라는 지적이 나온다.

10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농림축산식품부는 최근 한국회계기준원에 공시 기준서 제2호(기후 관련 공시)의 ‘전략’과 ‘지표 및 목표’ 항목에 ‘저탄소 농산물 인증제’ 실적을 반영해 달라는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제101호 제정이 사실상 무산될 가능성이 커지자, 투자자가 직접 확인하는 공시 본안 내부에 정책 내용을 서술 형태로 담아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부처들이 공시 본안을 겨냥하는 배경에는 이번 공시 체계의 구조적 특성이 있다. 최종안은 국제 기준에 따라 △거버넌스 △전략 △위험관리 △지표 및 목표 등 4대 요소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전략’은 기업이 기후 위험과 대응 방식을 비교적 자유롭게 설명하는 영역으로, 정책 방향이 녹아들 여지가 크다는 평가다.

실제로 특정 인증제나 정책 성과가 기후 공시의 전략 항목에 포함된 채 의무화될 경우, 식품·유통 기업들은 해당 기준을 충족하기 위한 경영 전략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정부는 별도의 재정 지원 없이도 공시를 통해 정책 확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공시가 사실상 ‘재무적 유인 장치’로 작동하는 셈이다.

논란의 핵심은 공시 정보가 자본 배분에 미치는 영향력이다. 공시 본안에 담긴 전략과 지표는 글로벌 자산운용사의 투자 판단은 물론, 국내 금융사의 대출 금리와 한도 산정에도 직접 활용된다. 특정 부처의 정책 지표가 점수화될 경우, 이를 충족하지 못한 기업은 자금 조달 과정에서 불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정부 내부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기조를 근거로 공시의 정책적 활용을 정당화하는 분위기다. 이 대통령은 2025년 7월 국무회의와 2026년 신년사 등을 통해 "안전과 환경은 비용이 아닌 투자"라고 규정하며, 중대 실책이 발생하는 기업에 대해선 "공시를 통해 투자자들이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부처 입장에서는 공시 본문에 정책 지표를 반영하는 것 자체가 국정 기조에 부합하는 성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반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재계 부담을 이유로 공시 대상 축소와 시행 시기 유예 등 이른바 ‘완화 요구’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쪽에서는 지표를 넣으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적용을 늦추려는 흐름이 맞물리며 공시 기준이 부처 간 이해관계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정책 지표가 혼재된 공시가 국제 표준인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 체계를 훼손하고 실제 기업 가치와 무관하게 자금이 배분되는 ‘재무적 역차별’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정준희 대구대학교 교수는 “회계 기준은 투자자를 위한 정보 체계인데, 개별 부처의 정책을 반영하는 것은 기준 설정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다”며 “성격이 다른 정보가 섞일수록 공시의 신뢰도와 활용도는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관계자 역시 “ESG 공시의 핵심은 글로벌 정합성 확보를 통해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있다”며 “국제 기준과 결이 다른 정책 지표를 본안에 삽입하는 것은 자본시장의 투명성을 저해하고 '우회 관치' 논란을 자초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많이 본 뉴스
댓글
0 /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