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총의 映樂한 이야기] 이제부터 긴 이야기를 시작할텐데 믿어줄 수 있어요?

입력 2014-07-28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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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미니홈피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모두 나만의 홈페이지를 만든답시고 대문이니 미니룸을 목수처럼 뚝딱거리며 만들어댔다. 완성된 미니홈피의 화룡점정은 배경음악이었다. 우리는 모두 마음을 표현하듯 신중하게 배경음악을 선택했고, 마음을 짐작하듯 다른 이의 배경음악을 귀 기울여 들었다.

이 이야기는 배경음악에 대한 이야기다. 굳이 따지자면 '영화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배경음악' 정도가 되겠다. 나는 영화의 '영(映)'자와 음악의 '악(樂)'자를 따서 '영악한 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였다. 영화에서도, 음악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제목이다. 제목이 튀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벌써 절반은 성공했다.

(사진=시월애 포스터)
◆영화 <시월애> 음반의 독특한 형식

다시 미니홈피로 돌아가 보자. 온 국민이 붉게 물들었던 2002년, 나는 내 첫 미니홈피의 배경음악을 영화 <시월애>의 삽입곡 '누구세요? 이제부터 긴 이야기를 시작할 텐데 믿어줄 수 있어요?'로 선택했다. 무슨 노래제목이 그렇냐고 하겠지만, <시월애> OST 음반이 그런 식이었다. 총 29개의 트랙이 담긴 음반은 영화 속 실제 대사들이 교묘하게 삽입되어 마치 또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했다.

예를 들어 처음 음반을 재생하면 1번 트랙 '누구세요? 이제부터 긴 이야기를 시작할텐데 믿어줄 수 있어요?'가 시작된다. 잔잔한 파도소리와 함께 "누구세요?"라는 전지현의 대사가 들리고, 뒤이어 "지금부터 아주 긴 이야기를 시작할텐데, 믿어줄 수 있어요?"라는 이정재의 대사가 흘러나온다. 이 트랙이 끝나면 곧바로 2번 트랙이자 영화의 주제곡인 'Must Say Good-bye' 노래가 시작되는 식이다.

이런 독특한 형식의 OST 음반이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시월애>의 음악감독이었던 김현철이 영화음악 전체를 총괄했기 때문이다. 제작과정에서 영화음악감독의 위치가 확고해지며 지금은 이런 시스템이 흔해졌지만, 당시에는 드문 케이스였다.

(사진=시월애 포스터)
◆음악감독 김현철과 퓨전재즈의 유행

사실 <시월애> OST 음반에 실린 모든 음악은 2~3개의 같은 멜로디 라인을 사용하고 있다. 김현철은 영화에 흐르는 모든 음악의 멜로디를 통일함으로써 음반 전체를 개연성 있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겨우 2~3개의 멜로디로 총 29개의 트랙을 지루하지 않게 끌어가는 힘은 김현철의 편곡 능력이었다. 이미 '동네'나 '춘천 가는 기차', '달의 몰락' 등을 통해 인증받은 김현철의 재즈와 팝에 대한 감각은 이 음반에서도 여실히 보여졌다. 특히 본인이 진행하던 라디오를 통해 팻 매스니에 대한 동경을 여러 차례 밝혔던 김현철은 이 음반을 통해 당시 유행하던 퓨전재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역량을 힘껏 드러냈다.

(사진=시월애 포스터)
◆영화의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 ‘음악’

<시월애>의 속도는 매우 느리다. 특히 느린 패닝과 팔로우는 보는 이를 영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이를 극대화하는 장치는 음악이다. 당시 한 평론가는 <시월애> 영화음악을 두고 "음악이 영화를 빛내는 것을 넘어 더 빨려 들어가게 한다"고 말했다. 자주 등장하는 다리 위의 팔로우 팬에 이은 일마레의 롱샷, 붉은 우편함과의 투샷 등은 18번 트랙 ‘인연(因緣)’과 맞물리며 무시무시한 감성의 폭발력을 자아낸다.

반대로 자칫 루즈해질 수 있는 영화의 속도감을 높여주는 것 역시 음악이다. 12번 트랙 '우울할 땐 요리를 하세요'에서 이어지는 13번 트랙 'Bossa Ghetti'의 보사노바 리듬이나 21번 트랙 '성현이가 지은 집'에 이어 터지는 22번 트랙 '놀이동산' 등은 영화의 몽타주와 어울려 롤러코스터 같은 빠른 속도감을 보여준다.

특히 14번 트랙 '우편함이었어요'에 이은 15번 트랙 '우편함'의 왈츠선율은 자칫 유치해질 수 있는 우편함의 달리샷과 화면분할을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을 명장면으로 만들어준다.

(사진=시월애 포스터)
◆14년을 뛰어넘는 사랑 <시월애(詩越愛)>

<시월애>는 흥행작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 영화를 5번도 넘게 돌려 봤다. 적어도 내게는 흥행작이었던 셈이다. 안개 낀 쥐색의 서해, 파스텔톤의 후보정, 다소 거친 입자감과 몽상적인 분위기, 빛을 이용한 영롱한 샷들은 이 영화가 '진짜 아날로그'임을 보여준다. 최근 유행하는 복고열풍을 등에 업고 만들어지는 뽀샤시한 드라마나 영화와는 아예 태생부터 다른 '진짜 아날로그'말이다.

'시월애(詩越愛)'는 한자로 시간 '시(詩)'자와 넘을 '월(越)', 사랑 '애(愛)자'를 쓴다. 해석해보면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뜻이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와 음악은 14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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