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선택과 호오(好惡)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이고 강제적인 상황이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한 피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국회도, 마을회관도 광대역 LTE 환경이다. 예전에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이미지들을, 이제는 의도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사람들은 시나브로 알몸에 알이 배겼다.
‘합법적 성희롱’도 남발되고 있다. 어느 순간, 이 사회에서는 여배우와 걸그룹, 치어리더 등의 노출이 1면을 장식하는 이슈가 돼 버렸다. 소심한 성격에 심장이 약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자들은 ‘충격’ ‘경악’ ‘아찔’ ‘파격’ ‘흥분’ 등의 어휘로 몸매를 평가하며 그들에게 성적인 폭력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기사는 대개 이해당사자 간 암묵적 합의가 된 것이며, 그 2차적인 폭력은 수용자에게 전도된다는 데 있다.
노출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다.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이 몸에 한정되어 있고, 주로 여성에게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세상의 모든 여성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이 굳이 벗은 여성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남성 중심의 자본주의, 미디어에서 여성의 노출은 빠르게 소비되는 기성품으로 전락한다.
뒤집어 봐야 한다. 벗겨진 알몸에 숨겨진 자본주의의 옷, 주체적 여성의 객체적 대상화 문제를 말이다. 많은 이들이 성범죄 기사에는 공분하지만, 정작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무분별한 노출에는 관대한 현실. 히잡으로 잡힐 문제가 아니라면, 노출에도 ‘민주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