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 어릴 적 꿈은 시인이나 역사가가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추억들이 엉성하지 않게 채워주는 것에는 시나 역사가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창시절 동안 책을 많이 읽으려 했던 것 같다. 특히, 가을이면 연애에 영 소질이 없는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놀이 상대가 책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 그 시절의 책들은 더 이상 책이 아니었다.
어느 시에서처럼 ‘가슴에 수를 놓고, 뚫린 입에 단추를 채워 마구 튀어나오는 실밥 같은 단어들을 동여매 주는 바늘이었다. 책은 바늘이 되기 위해 무성한 뾰족함은 온갖 은유와 비유를 갈아 없애고, 닫친 바늘귀를 눈물로 퇴색시켜, 섬섬옥수 문장을 꿰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가을 추억의 여백들 속에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문장들이 가물거리고, 채 아물지 않았던 서툰 지식들이 어렴풋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일까.
벌써 가을이다. 자고 일어나니 어디선가 본 가을이 문득 왔다. 바쁜 업무를 끝내고서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책 한 권을 펴 들었다. 환절기의 가벼운 감기가 내 안에서 잠시 어지럽다가 콜록거리고 책상엔 할 일들이 수북하지만 바쁜 일상에서의 여유가 가슴속에 꽉 차서, 아 벌써 가을이구나 하고서 또 다시 깨닫는다.
토드 사일러 박사가 창조적 인간은 예수 같은 은유자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지식경제시대의 최고의 재화로 손꼽히는 창조적 인간인 이러한 은유자는 평생 동안 배우고, 창조하고, 탐구하고, 가르치고 나누는 사람들이다. 이들에 의해 언뜻 보아 상관없이 보이는 관찰물들이 비유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됐고 이는 인류의 위대한 창조물로 연결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을은 다른 계절에 비해 참으로 은유적인 계절인 것 같기도 하다.
항상 감정보다는 이성을 더 많이 쓰며 사는 건조한 시간들 속에 가을은 내 뿌리에 물을 주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창 밖 가을비처럼 내 앞에 나타난 수줍은 아내는 스산한 가을이면 괜스레 우울해진다고 하는데, 이제 그녀가 곤한 머리를 기댈 내 어깨에 눈 녹은 듯한 둥그런 자리가 생겨날 계절이 곧 오겠지. 그러면, 우리 마음이 차가운 문 밖으로 불려나가지 않게 단단히 아랫목에 묶어 놓고서 다시 여유를 차려 책 한 권 또 읽어야겠다. 마음이라는, 혹은 정신이라는 우리의 보이지 않는 뿌리가 더 건강해질 때 다가올 겨울 추위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