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숙명의 라이벌 막전막후]페라리, 막강한‘스피드’vs 람보르기니, ‘명품차’로 승부

입력 2013-06-1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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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카 대명사 페라리, 스피드를 압도하다

‘달리는 예술품’·‘전설의 슈퍼카’….

페라리는 강력한 성능과 강렬한 디자인을 뽐내며 람보르기니와 함께 슈퍼카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페라리의 차들은 전 세계 자동차 경주에서 5000회 이상 우승하며 전설로 남아 있을 만큼 스피드에서 압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페라리 설립자인 엔초 페라리는 카레이서 출신이다. 그는 1929년 자신의 이름을 딴 ‘스쿠데리아 페라리’라는 경주 팀을 만들어 활동했다.

이 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랑프리 경주 팀으로 지금까지 세계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페라리 엠블럼의 뛰어오르는 말의 양옆에 써 있는 ‘S’와 ‘F’는 이 팀을 상징한다.

자신의 팀과 함께 이탈리아의 모든 경주를 석권하던 엔초는 1932년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팀 관리와 경주용 자동차 제작에만 몰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자동차 생산이 재개되자 엔초는 페라리 이름을 단 첫 번째 자동차 ‘페라리125 Sport’를 탄생시킨다. 이 차는 1947년 5월 피아첸차 서킷에 데뷔한 지 2주 만에 로마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엔초는 1952년 스포츠카의 거장 피닌 파리나를 영입해 페라리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페라리는 달리는 예술품이자 전설의 슈퍼카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다.

슈퍼카 신드롬을 일으켰던 모델은 1984년 선보인 ‘288GTO’다. 페라리 최초로 엔진에 트윈 터보를 장착해 최대출력 400마력, 최고시속 304㎞를 달성한 모델이다.

페라리 40주년 기념 모델로 1987년 발표한 ‘F40’은 페라리의 최대 걸작으로 꼽힌다. 이 차는 엔초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개발한 유작이기도 하다.

F40은 트윈 터보에 힘입어 최대출력 478마력에 최고시속은 무려 324㎞를 냈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3.8초에 도달했다. 페라리는 이 차 덕분에 1987~1989년까지 세계 최고속 양산 차의 타이틀을 보유하게 된다.

페라리는 올해 초 영국 브랜드 평가 컨설팅사 브랜드 파이낸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 1위에 선정되는 등 슈퍼카의 왕좌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지난해에는 ‘F12 베를리네타’가 독일 자동차 전문지 아우토빌트와 빌트암존탁 신문사가 공동 주관한 ‘2012 골든 스티어링 휠 어워즈’에서 쿠페·컨버터블 부문 최고의 자동차로 선정되기도 했다.

대당 가격이 3억원이 넘고 주문생산만을 고집하지만 페라리를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정도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페라리는 지난해 전 세계에서 7318대가 판매돼 인기를 실감케 했다. 올해 1분기에도 판매가 급증해 세전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42% 늘었다.

◇명품차 림보르기니, 페라리의 영원한 맞수

올해로 설립 50주년을 맞은 람보르기니는 페라리의 영원한 맞수다.

람보르기니는 지난해 2083대를 판매했다. 이는 지난 2011년의 1602대에서 30% 늘어난 것이다. 매출은 전년보다 46% 급증한 4억6900만 유로(약 7000억원)를 기록했다.

재정위기와 경기침체에도 유럽 판매가 전년보다 34% 증가했고 미국 판매도 50% 늘었다.

람보르기니의 시장은 크게 유럽과 미국, 아시아·태평양 등 3개로 나뉜다. 유럽은 지난해 회사 판매의 29%, 미국이 28%를 차지했다. 아시아·태평양은 35%, 그 가운데 중국이 15%를 차지했으며 중동·북아프리카 시장의 비율이 8%였다.

회사의 현재 주력 모델인 아벤타도르의 높은 인기가 실적 호조를 이끌었다. 이 모델은 이달 출시 2년 만에 2000대 누적 생산 돌파라는 기록을 세웠다. 아벤타도르 이전 주력 모델인 무르시엘라고의 2000대 생산이 4년 6개월 만에 이뤄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선풍적인 반응이다.

람보르기니는 설립 배경부터 페라리와 관련이 있다. 트랙터와 에어컨 생산으로 막대한 부를 일군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지난 1963년 람보르기니를 설립했다.

페루치오는 당시 갖고 있던 페라리가 고장이 잦자 페라리 설립자 엔초 페라리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한다. 이에 심한 모욕감을 느낀 페루치오가 페라리를 능가하는 스포츠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람보르기니다.

람보르기니는 설립 다음해인 1964년 회사 첫 모델인 ‘350GT’를 출시하고 2년 후에 공공도로 스포츠차 중 처음으로 미드십(엔진을 운전석 뒤쪽에 배치) 방식을 채택한 걸작 ‘미우라’를 선보이면서 빠르게 고급 스포츠카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람보르기니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막대한 기술투자로 인한 자금난과 함께 1973년 석유파동의 직격탄을 맞았다. 페루치오는 1972년 회사 경영권을 조지 헨리 로제티에 넘긴 데 이어 2년 후에는 잔여 지분 49%를 스위스 사업가 르네 라이머에게 넘기면서 람보르기니에서 손을 뗐다.

람보르기니는 파산하기도 하고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진통 끝에 1998년 독일 폭스바겐의 아우디 산하로 들어갔다.

아우디의 인수 후 람보르기니는 가야르도와 레벤톤, 아벤타도르 등 히트작을 내놓아 이탈리아의 감성과 독일 장인정신이 결합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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