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채 만기 9조 도래… 경영악화 속 퇴출 공포
국내 은행이 지난해 말 기준 대기업에 빌려주거나 보증을 선 돈은 총 221조원이다. 이 중 5분의 1인 48조원은 떼일 위험성이 높은 잠재적 부실로 분류됐다.
영업으로 이자도 못 갚는 이자보상비율 100% 미만인 한계기업여신은 32조2000억원. 한계기업으로 분류된 동시에 요주의 여신을 보유한 고위험 익스포저는 11조6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통계치는 최근 분석기관인 한국은행이 처음으로 국내 대기업의 위험상황을 적나라하게 분석한 결과다. 잘나가는 줄로만 알았던 대기업들의 자금사정이 눈에 띄게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금융권도 놀랐다.
위험여신이 많다는 것은 언제든 부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안고 있다. 대기업은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다. 대기업에 빌려준 돈이 부실화하면 은행도 온전할 수 없다는 방증이다.
최근 은행권은 대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평가작업이 한창이다. 일부 대기업의 경우 이미 수년 전부터 재무상황에 빨간불이 들어왔지만 허송세월을 하는 바람에 부담만 커졌다는 지적이 불거지고 있다.
채권은행들은 이달 말까지 30개 대기업 주채무계열에 대한 평가를 마친다. 결과를 토대로 재무상황이 좋지 않은 그룹에 대해서는 늦어도 다음달 말까지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체결한다는 방침이다. 체결 대상은 다음달 초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6개 그룹이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었던 것을 감안하면 올해도 지난해 수준인 5~6개 안팎의 그룹이 대상에 포함될 전망이다.
은행권이 대기업에 빌려준 돈의 5분의 1인 48조원은 부실위험이 높다. 대기업대출의 5분의 1에 적신호가 켜진 셈이다. 특히 건설·조선업을 보유한 대기업의 고위험 익스포저가 3조원을 넘어 잠재위험이 높았다. 건설사를 가진 대기업은 다른 계열사로 부실이 옮겨가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 수준의 충격을 받을 경우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이 14.4%에서 12.1%까지 떨어져 22조원의 손실을 볼 수 있다는 게 한국은행의 분석이다. 산업은행이 구조조정 중인 대기업 여신을 감안하면 잠재위험수치는 더 커질 수 있다.
대기업들이 빌려간 돈이 부실로 분류되는 것은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이 시원찮기 때문이다. 매출액영업이익률은 2009년 6.2%에서 2012년 5.2%로 떨어졌다. 반면 은행에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는 연체율이 같은 기간 0.2%에서 1.1%로 뛰어올랐다. 대출 상환 약정기간이 만료됐지만 연체로 분류되지 못한 대출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연체율은 더욱 높아진다. 한계상황에 직면한 대기업들이 갈수록 속출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대목이다.
◇회사채 만기 공포…퇴출 대상 늘어난다= 금융당국이 대기업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면서 부실기업들이 긴장하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조선과 해운, 건설 같은 경기 민감 업종을 갖고 있는 그룹들이 올해도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피해 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 기업들의 회사채 만기가 올해와 내년에 걸쳐서 돌아오고 있지만 경영상황이 악화되면서 퇴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올 들어 만기가 도래하는 조선, 해운, 건설 등 취약업종의 회사채는 8조4000억원에 이르고 있다. 건설이 4조9820억원으로 가장 많다. 해운이 1조8500억원, 조선이 1조5100억원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를 막지 못할 경우 줄도산이 불가피하다.
문제는 이들 취약 업종의 신용등급 하락으로 신용 스프레드(국고채와 회사채 금리차)가 확대되고 추가 발행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자율협약을 신청한 STX조선해양과 STX그룹의 회사채 신용등급은 최근 BBB+에서 BBB-로 강등됐다.
금융권 관계자는 “경영 실적이 악화된 상황에서 채권을 신규로 발행할 경우 신용등급 하락으로 신용 스프레드가 확대돼 발행에 어려움을 겪어, 경기가 개선되지 않을 경우 제2, 제3의 STX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금융권에서 빌린 돈이 500억원을 넘는 대기업에 대해 지난 4월부터 신용위험 평가 작업을 벌이고 있다. 6월까지 세부평가 대상 기업을 정해 워크아웃 또는 퇴출을 결정할 방침이다. 최종적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올해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는 그룹 수는 늘어날 것이란 게 지배적 시각이다. 경기침체가 예상외로 심각해 오히려 추가로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