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이경엽 KDB산업은행 실장 "사전은 장난감이다"

입력 2012-08-1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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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마을이 고향인 나는 초등학생 시절, 여름이면 해변에서 예쁜 조개껍데기를 골라 주워 조개채집을 하곤 했는데, 마흔을 넘긴 어느 날부터인가 사전을 뒤적이며 재미있는 낱말을 채집하고 있다. 그것이 십 년이 훨씬 넘다보니, 모은 낱말들에서 일부를 골라 책으로 엮을 기회도 생겼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출판하는 것은, 조개채집 과제물을 선생님께 제출할 때보다 더욱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국어사전은 없더라도 영어사전 없는 집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영어 단어 철자 하나 틀릴까하여 수십 번을 되풀이하여 외우면서도, 한자어가 70%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말의 정확한 뜻을 찾기 위해 옥편 한 번 펼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다보니 한자 낱말들이 토박이말처럼 사용되고 있다. 의미는 달아나 온데간데없고, 껍데기 발음만 회자되고 있다. 이런 낱말들이 가엾다. 껍데기 낱말들이 어지럽게 춤추는 사회가 공허하고 깊이가 없을 것은 뻔한 이치다. 어느 날 무심코 펼쳐 든 사전에서 '금자탑(金字塔)'이 피라미드를 뜻한다고 알았을 때, 낱말이 그동안 감싸고 있던 베일을 벗고 속살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무정물(無情物)같던 낱말이 유정물(有情物)로 다가왔다. 그날 이후, 사전은 요즘 말로 내 절친이 되었다.

나름대로 어원을 연구하다보니 나만의 학설(?)도 가지게 되었다. '대통령'이란 명칭이 그 중의 하나다. '대통령'은 '대+통령'인데, 나는 이 명칭의 '큰 대(大)' 자가 우연히 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이나 일본의 연구자들 중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설명이 길어 자세한 내용을 여기에 적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다.

기호들의 이름에도 재미있는 것이 많다. 인터넷 메일에서 흔히 쓰는 이른바 골뱅이@의 우리말 이름이 '동그람에이'라는 것도 국어사전에서 우연히 보았다. 퍼센트를 나타내는 기호 %는 '쌍방울표', 가로쓰기의 큰따옴표 " "는 '게발톱표', 세로쓰기의 작은따옴표 「 」는 낫처럼 생겼다하여 '낫표', 큰따옴표 『 』는 '겹낫표'라 한다. 부등호 〈 는 '가랑이표', 〉는 '거꿀가랑이표', 소괄호 ( )는 손톱처럼 생겨 '손톱묶음', 중괄호 { }는 활의 몸처럼 생겼다하여 '활짱묶음', 대괄호 [ ]는 꺾쇠처럼 생겨 '꺾쇠묶음'이라 하는 것도 모두 사전에서 알았다.

오랜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도 몰랐던 은행 용어들도 옥편과 씨름하며 많이 알았다. 은행은 화폐(銀)를 취급하는 회사(行)다. 통장은 가지고 다니는(通) 장부(帳)이며, 당좌예금은 그 즉석(當座)에서 인출할 수 있는 예금을 뜻한다. 차관은 관(款) 곧 돈이나 신용을 빌려온다(借)는 뜻이며, 현금은 지금 현재(現) 가지고 있는 돈(金), 통화는 한 나라 안에서 통용되고 있는 통용화폐(通用貨幣) 또는 유통화폐(流通貨幣)를 줄인 말이란 것도 모두 사전을 찾고, 옥편을 뒤적이며, 어원을 연구하며 깨달았다.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들이다.

어떤 낱말의 정확한 뜻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양지차(天壤之差) 곧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클 수가 있다. 본래의 뜻을 모르고 껍데기 발음만으로 읽는 한자 낱말들은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제한하며, 이성과 감성의 발전을 가로 막는다고 생각한다. 국가에서 한글전용 정책을 계속하더라도, 개인들은 한자를 공부하고 사전을 펼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국어사전이나 옥편들을 보면 아쉬움이 많다. 특히 나처럼 낱말의 어원과 유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사전들은 내용이 빈약하고 설명이 불친절하다. 앞으로 낱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리라.

사전은 나에게 해변의 백사장과 같은 놀이터이며, 장난감이며, 오래된 친구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사전을 가까이 하도록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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