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휴가
“올해부터는 휴가를 꼭 챙겨가는 분위기로 바뀌었어요. 심지어 전통적으로 여름휴가를 보내는 것이 불가능했던 예산실 사람들도 휴가를 거의 다 갔다왔거든요.”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중앙부처 공무원들의 워커홀릭(일중독.일(work)과 알코올중독자(alcoholic)의 합성어) 문화에 변화가 생겼다. 과거에는 국장이나 과장이 “내일 아침에 보고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게”라고 지시를 하면 퇴근 무렵이라도 아랫사람은 야근해서라도 일을 마쳐야 했다. 가족이나 지인과의 약속이 있더라도 말이다. 밤새 보고서를 작성해 놓고는 녹초가 돼 퇴근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하지만 요새 관가에는 적절한 휴식이 일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쉼표’ 문화가 어느 정도 정착된 분위기다.
예산실 직원들은 작년까지만 해도 여름휴가는 꿈도 못 꿨다. 매년 10월 2일께 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하려면 직원들은 7~9월 예산시즌 동안 여러 부처와 기관, 자치단체장들을 만나며 본격 예산편성 작업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찌는듯한 더위에도 휴가를 가지 못했다. 자녀 방학이 다 끝난 후 가을이나 돼야 겨우 며칠씩 갔다 오는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는 ‘예산실 여름휴가 가기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우선 예산 편성 작업을 평년보다 서둘렀다. 매년 6월 말까지 받던 각 부처의 예산요구서를 열흘가량 앞당겼다. 이렇게 예산안 1차 심의를 일찍 마무리했다. 예산실장을 포함한 예산실 직원들은 남는 기간을 이용해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여름휴가를 모두 다녀올 수 있도록 했다.
예산실 한 과장은 “작년까지만 해도 예산실에 여름휴가 자체가 없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올해 다른 부처럼 5일까지는 아니지만 2~3일 정도 꼭 챙겨서 여름휴가를 가도록 했다.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설명했다.
각 부처와 기관들에 나랏돈을 얼마나 배정할지를 결정하는 예산실의 권한은 막강하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선호 1순위 부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을 위해서라면 희생을 묵묵히 감수했던 이전 세대와는 다른 가치관을 갖은 신세대 사무관들이 들어오면서 예산실은 기피부서가 1순위가 됐다.
재정부가 변한 것은 박재완 장관의 주문때문이다. 박 장관은 지난해 “이번 여름, 휴가 꼭 다녀오십시오”라고 직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또 자신이 솔선수범해 휴가를 다녀오기도 했다.
지난 6월에는 ‘830∼530제도’(8시반 출근 5시반 퇴근)를 도입했다. 일회적이라고 할 수 있는 휴가 제도 외에도 직원들의 평소 근무시간에도 메스를 가한 것이다. 이에 따라 재정부 직원들은 가정의 날인 수, 금요일은 정시에 퇴근할 수 있게 됐다.
재정부는 제도적으로도 직원들이 휴가일수, 퇴근시간 등을 국·과장들의 평가엔 반영하도록 하고 있다.
재정부 예산실 외에도 관가에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만들어가려는 분위기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지난해 말 결혼한 국토해양부 사무관은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열흘간 여름휴가를 냈다”며 “여전히 눈치가 보이긴 하지만 확실히 예전과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휴가뿐 아니라 공무원들의 ‘월차’라고 할 수 있는 연가사용도 최근 늘어나는 추세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중앙행정기관 공무원 1인당 평균 연가사용일수가 9.2일을 기록, 최근 3년간 공무원 연가 사용이 꾸준히 늘고 있다.
2009년 9월 이후 도입된 월례휴가제도가 정착됐기 때문이다. 월례휴가제는 공무원 휴가 활성화를 위해 월 1회 휴가 사용을 장려하는 제도다. 매년 4000여억원에 이르는 미사용 연가일수 보상금 예산을 절감하는 한편 국내 관광레저산업 육성, 재충전에 따른 자기계발 등 생산적인 공직문화 조성을 위해 도입됐다.
근무한 지 20여년 된 재정부 세제실 사무관은 “10년 정도 근무를 하면 1년에 22일정도 연차가 발생하지만 절반도 못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며 “최근 들어 15일 이상 쓰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