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FT, ECB 역할 모호…시장 신뢰 회복에는 부족
유럽연합(EU)이 재정 건전성을 강화하는 ‘신 재정협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지만 역내 위기를 진화하는 데는 불충분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시장은 EU 지도자들이 합의에 도달한 데 대한 안도감이지, 재정협약 그 자체에 열광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들이 분석했다.
시장은 이날 새 재정협약 합의 소식에 뉴욕증시가 1.55% 급등하고 유럽 증시도 상승세로 마감하는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장에서는 유럽중앙은행(ECB)의 역할이 채무위기 해결엔 미흡하다며 EU 정상회의 결과가 여전히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시장은 앞서 발권력을 가진 ECB가 나서 재정위기국의 채권을 매입하는 등 ‘실탄’을 적극적으로 공급해야만 유로존 위기가 진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의 자크 카이유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시장의 유일한 질문은 ECB가 국채시장에서 더 강력하게 개입할 길이 이번 합의를 통해 열릴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EU 정상회담에서 ECB의 역할이 분명하게 명시됐지 않앗다고 WSJ는 보도했다.
FT는 자금시장을 안정시키려면 정부채권에 대한 부분적 손실이나 디폴트(채무불이행)가 없다는 시장의 신뢰가 필요하지만, 이러한 신뢰를 줄 수 있는 것은 발권력을 가진 ECB 뿐이라고 지적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ECB가 유럽 은행들의 최종 대부자이기는 하지만, 유럽 정부들은 구제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FT는 EU 정상들이 이번 회의에서 드라기 총재의 이런 입장을 누그러뜨릴 만한 대책을 도출해내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EU 정상회담에서 도출된 새 재정협약이 언제 실행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도이체방크의 모히트 쿠마르 유럽금리전략가는 “정상들이 재정통합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면서도 “그러나 실제 실행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새 협약은 재정 적자의 비중을 국내총생산(GDP)의 3%, 누적채무는 60% 이내로 유지해야 하며 이를 위반하는 국가의 경우 자동으로 처벌받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이에 참여한 국가들은 ‘황금률’을 헌법이나 법규에 반영해 재정 건전성을 지키도록 했다.
EU 법률가들은 다음 주에 새 협약에 들어갈 자구 구성에 착수할 예정이며 EU 정상들은 내년 3월까지 협약을 마련해 각국의 비준을 받는다고 계획했다.
다만 일부 국가는 협약 비준을 위해 국민투표를 해야 할 것으로 전해져 비준 일정이 투표에 따라 상당히 늦어질 가능성도 있다.
영국이 유럽에서 고립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새 재정협약에 거부권을 강력하게 밝혔다.
캐머런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영국에 대한 적절한 보호조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조약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며 “새 재정협약은 영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새 재정협약 체제에는 유로존(유로화 사용국) 17개국 뿐만 아니라 비 유로존 10개국 중 6개국이 참여를 확정하고 3개국은 의회 협의 절차를 진행키로 해 사실상 영국만이 반대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캐머런 총리가 런던의 금융지구인 ‘시티’의 우월성을 유지하려 영국의 유럽 내 지위를 희생한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새 재정협약을 체결할 경우 각종 규제로 인해 시티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캐머런 총리의 이런 결정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으로 남아있다고 NYT는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영국이 유럽 안팎에서 전통적으로 취해온 전략적 행동을 포기하고 강경노선을 취하게 된 데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
찰스 그랜트 유럽개혁센터(ECR) 소장은 “이번 정상회의는 영국에 재앙”이라며 “정말 우려되는 점은 영국이 협상테이블에 앉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