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역대 은행장 황태자도 있었다

입력 2011-09-0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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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민족은행으로 첫 발을 뗀 우리은행의 역대 은행장 중에 눈에 띄는 인물이 있습니다. 마지막 황태자로 우리은행(당시 대한천일은행) 제2대 은행장인 영친왕이 주인공입니다.

당시 ‘조선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 팔 수 없다’고 정관에 명시할 정도로 민족자본은행의 성격이 짙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민족자본만을 이용한 은행설립이 많이 시도됐지만 모두 좌절됐고 당시엔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만이 유일하게 남았습니다.

고종황제도 주주로 참여한 대한천일은행에 초대 행장인 민병석에 이어 영친황이 은행장에 취임했던 것은 국고금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자본금 5만6000원과 불입자본금 2만8000원으로 출발한 대한천일은행은 이후 자본금의 불입이 여의치 못해 국고금 5만원을 5년 상환기간으로 대여받았습니다. 정부자금이 쓰인 것입니다.

주주가 바뀌었으니 경영진 역시 바뀌는 것은 오늘날과 같습니다. 이로 인해 1902년 3월 영친황이 은행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또 당시 내탕금을 관리하던 이용익이 부행장이 됐습니다.

은행의 성격도 황실과 깊이 연관된 정치색을 띠게 되어 특수은행의 성격으로 바뀌었습니다. 1905년에는 금융공황과 더불어 자본의 약소성과 자체 경영상의 실패로 1년동안 휴업상태로 빠지기도 했습니다.

1906년 6월 자본금을 15만원 증자한 이후 관료-국가중심의 경영체제에서 벗어난 상인중심 체제로 바뀌게 됩니다. 이는 은행 측에서 황실의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기도 했지만 당시 국내에 상주하고 있던 탁지부 고문 메가타 다로지로가 꾸민 일이기도 합니다.

메가타의 주선으로 정부로부터 25만원이란 거액을 무이자로 받게 된 대한천일은행은 이후 한국이ㅡ 제일은해잉 되는가 했지만 메가타가 경영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게 됐습니다. 이후 일제치하에서 일본정부는 황실과 은행 간에 맺어진 채권-채무 관계를 일시에 정리해버리고 '대한'이라는 용어를 은행명에서 뗄 것을 지시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대한천일은행은 상호를 조선상업은행으로 바꾸고 완전히 일본의 지도 하에 놓이게 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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