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규제가 은행 망친다대주주 승인·M&A·금리…사사건건 경영에 간섭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가졌지만 세계 50위권 은행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현실입니다.”
최근 기자와 해외 금융전문지 ‘더 뱅커’지(誌)가 발표한 ‘세계 1000대 은행’에 대해 얘기하던 한 금융회사 고위 관계자는 이같이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1990년대 말 불어닥친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금융산업이 한 단계 성장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우리나라 은행산업은 정체해 있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 금융권 안팎에서는 정부 규제 등 ‘관(官) 리스크’와 ‘단기 성과주의’를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
◇관(官) 리스크에 묶인 금융산업= 금융감독과 규제의 실패가 금융위기를 초래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금융산업, 특히 은행산업의 성장을 더디게 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관(官) 리스크를 꼽는다.
정부는 은행에 있어서 최대주주 승인권과 감독 및 검사권 그리고 이에 따른 임원 면직권이 있다. 따라서 금융지주사와 은행 등 금융산업에 종사하는 경영진의 최종결정자는 사실상 정부다. 주주권이 제한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로 지난해 하나금융지주는 론스타와 외환은행 지분인수 계약을 마무리했지만 금융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다. 외환은행 인수를 전제로 임원 인사와 경영계획을 세웠지만 승인이 늦어지면서 리스크만 커지고 있다.
산업은행의 리먼 브라더스 인수도 ‘관 리스크’의 대표적 사례다. 산은은 2008년 파산한 리먼 브라더스의 우량 자산을 인수하려고 했지만 당시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해 좌절했다. 그 사이 바클레이즈는 리먼브라더스의 북미사업부문을 인수하고 노무라는 아시아·중동·유럽사업부문을 인수하면서 글로벌 리딩그룹으로 다시 한번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산업은행, 더 나아가 금융산업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오히려 최근엔 금융회사의 경영에 직접 관여키도 한다. 예컨대 정부가 가계부채 해소를 위해 은행에 ‘고정금리대출 비중확대’를 요구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계대출을 제한하고 예대마진을 통제하는 것을 넘어서 은행이 리스크를 떠앉고 영업을 하라고 강제한 것과 다름없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장기고정금리 대출비중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은행 역시 장기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리스크를 어느정도 해소시켜줘야 한다”면서 “커버드본드나 주택저당증권(MBS) 등 장기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규제는 풀지 않은 채 무작정 비중 확대만 요구하면 결국 은행 성장을 더디게 하게 만들 뿐”이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금융산업에 대해 주주권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려고 한다”면서 “금융산업에는 다른 산업과 달리 ‘금융감독당국’있는 것처럼 감독권을 중심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직접 주주권을 제한하는 것은 결국 은행의 성장, 금융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단기 성과주의 치중= 단기 성과주의도 금융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꼽힌다. 금융회사 스스로가 성장 정체를 불러오는 것이다.
이는 경영진들이 2~3년이라는 기간동안 성과를 내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외부에서 영입된 지주 최고경영자(CEO)들은 단기성적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보니 무리한 영업과 투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외부에서 온 CEO들이 계량화된 단기 성과에 집착했다”며 “‘양적 성장’에 치중하다보니 ‘질적 성장’은 상대적으로 도외시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몇년 전부터 은행을 중심으로 금융산업 전반에서 “단기성과주의로 건전성 희생 영업관행이 문제”라며 자기반성에 나섰지만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이병윤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은행권은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대출 중심의 자산 확대 경쟁을 벌였지만 수익률이 악화되고 부실채권비율이 올라간 경험이 있다”며 “당시 금융당국도 규제 수단 취약했고 은행 경영진도 단기성과 인센티브 등으로 은행 간 과당 경쟁은 더욱 심화됐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은행권은 과거 경험에 비춰볼 때 국내시장에서의 자산 확대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진출을 도모해야 한다”며 “또한 내실 경영을 통한 수익성 개선에 더욱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