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배분·재원 확보, 섬세한 정책 설계 필요해
GPU에만 집중하다가 엔비디아 생태계 매몰 우려도

이재명 대통령의 제1호 공약 ‘인공지능(AI) 투자 100조 원’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고성능 AI용 그래픽처리장치(GPU) 5만 장 확보다. 2027년까지 GPU 3만 장을 확보하겠다는 이전 윤석열 정부 목표보다 2만 장 많은 수치다. 그만큼 AI 인프라의 양적·질적 도약을 노린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나, 양적인 투자보다 섬세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온다.
정부가 AI 인프라 확보를 위해 추경 1조4600억 원을 투입한 ‘국가AI컴퓨팅센터’는 차질을 빚고 있다. 공모 사업에 참여하려는 기업이 없어 사업이 두 차례 유찰된 까닭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국가AI컴퓨팅센터 구축 사업 재공고(연장 공고)를 2일부터 13일까지 진행했으나, 이번에도 유찰됐다.
국가AI컴퓨팅센터는 AI 인프라 확보를 위해 전 정부에서 적극 추진하던 핵심 과제 중 하나였다. 민·관 합작 투자를 통해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해 AI 컴퓨팅 인프라를 구축하는 사업으로, 연내 GPU 1만 장 등 총 3만 장을 공급해 속도감 있게 사업을 추진한다는 계획이었다.
공모 사업이 유찰된 건 기업들이 투자 비용 대비 사업의 수익성이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GPU 확보를 위한 실탄은 확보했는데, 정작 실탄을 쏠 총은 없는 것이다. 2차 재공고가 마무리되기 전부터 업계에서는 공모 조건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참여하는 기업이 없어 유찰될 거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정부로서는 실효성 있는 인센티브·지원책 마련이 시급해졌다. 과기정통부는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 부처와 향후 사업 추진 방향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가AI컴퓨팅센터 공모 사업 유찰은 양적인 인프라 확보만큼이나 인프라를 관리할 예산·인력·전력 확보를 위해 섬세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국내 최대 규모인 광주 국가AI데이터센터의 경우 총 2184개 GPU를 보유하고 있으나, 올해 운영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가동률이 50%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IT 업계 관계자는 “GPU만 산다고 AI 산업 생태계가 발전하는 게 아니다. GPU를 어떻게 활용하고 배분할지 고민해야 한다”면서 “3만, 5만 장이라는 숫자 자체도 어떤 계산에서 나왔는지 솔직히 의문”이라고 말했다.
GPU 5만 장 확보를 위한 재원 마련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도 물음표가 붙는다. 엔비디아의 주력 제품인 H100, H200 가격은 3만 달러(약 4000만 원)에서 4만 달러(약 5500만 원) 선이다. 최신 블랙웰 시리즈 GPU는 최소 5만 달러(약 7000만 원)로, 이를 5만 장 구매한다면 약 3조400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지각변동 속에 GPU 확보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어 필요 예산은 이보다 더 늘어날 전망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GPU에 집중된 투자를 분산해 국산 AI 반도체인 신경망처리장치(NPU)가 활발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정부는 올해 추경 494억 원을 포함해 AI 반도체 분야에 총 243억 원을 투입했지만, 연구개발(R&D), 실증, 인재 양성에 집중돼있다.
업계 관계자는 “GPU 확보에 집중된 투자는 엔비디아 쿠다 생태계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면서 “국가AI컴퓨팅센터에 2030년까지 국산 AI 반도체 50% 구매하겠다고 하지만, NPU 상용화를 앞당기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