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콘텐츠를 의미하는 '숏폼'의 시대는 이미 찾아온 지 오래입니다. 10초에서 40초 사이의 영상인 숏폼은 2020년대 들어 릴스와 쇼츠의 등장으로 그 인기가 더 거세졌죠.
숏폼의 인기로 기존 드라마 시장과 OTT가 위기라는 말도 나왔어요. 매우 짧아도 8부작, 기본 12~20부작으로 제작되는 드라마를 다 보려면 수십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웬만한 명작이 아니라면 정주행·본방사수보다는 유튜브 요약을 보거나 숏폼 요약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서죠.
숏폼의 역습으로 인한 위기는 비단 드라마·영화 시장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큰돈을 쓰는 메이저 프로 스포츠 역시 인기 감소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이에 기성 메이저 스포츠들은 더 짧거나 빠르거나 색다른 방식을 접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데요. 대표적인 상업 스포츠인 축구와 야구도 예외는 아닙니다.
올 시즌을 앞두고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는 새로운 규정 도입 여부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렸습니다. 결정적인 득점 찬스 상황에서 감독이 원하는 타자를 순번과 상관없이 경기당 1차례 올릴 수 있도록 하는 ‘황금 타석’ 규정 때문인데요. 이 규정이 도입되면 오타니 쇼헤이, 애런 저지 등 각 팀의 최고 타자들이 경기의 분기점이 될 순간에 등장해 ‘게임 체인저’가 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스포츠 전문 매체인 디애슬래틱,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등 외신은 롭 만프레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가 해당 규정 도입 가능성을 내비쳤다고 보도했어요. 축구나 미식축구, 농구 등 타 구기 종목에서는 승부처에서 의도됐든 아니든 스타 선수에게 기회를 몰아줘 경기에서 승리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열광케 해 팬 증가와 수입 증가 등으로 이어지는데, 야구는 현재 규정으로서는 이러한 선순환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야구팬들은 물론 프로 선수들도 반대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야구 룰 변화로 재미 면에서 강화를 꾀하자는 취지는 알겠지만, 이는 야구 규칙의 근본을 훼손하는 조치라고 본 거예요. 또한, 무명의 선수가 결정적 기회에서 승리를 이끌며 새로운 스타가 되는 스토리가 실종될 것이란 우려도 나왔죠.
이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현재로써는 황금 타석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야구팬들은 미국 독립리그에서는 시범적용 중인 만큼 언제든 다시 도입 계획이 표면 위로 올라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FC 바르셀로나 출신 레전드 수비수인 제라르 피케는 올해 초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축구의 오락성을 높이기 위해 0-0 무승부 시 양 팀 모두 승점을 받을 수 없도록 하는 새로운 규칙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축구 인기가 감소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상황에서 재미없는 경기의 수를 줄여나가는 한 가지 방법으로 새로운 승점 규칙을 제시한 거예요.
피케의 의견은 한 유명 선수 출신의 개인 의견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국제 축구경기 규칙 개정을 관장하는 기관인 국제축구평의회(IFAB) 역시 급진적인 규칙 변경에 지속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죠.
IFAB는 2017년 전후반 경기 시간을 90분에서 60분으로 줄이는 대신 선수 교체, 파울로 인한 경기 멈춤 상황 시에는 시간이 멈추도록 하는 규칙 변경 안건을 내놓았습니다. 선수들이 판정에 항의하고, 세레모니에 시간을 낭비하는 등 90분간 콤팩트 한 경기를 할 수 없다면 정규 시간을 줄이고 경기 지연을 못 하도록 유도하는 게 좋다는 거죠. 이 안건은 통과되지 못하고 있지만, 지난해에도 이와 관련한 논의는 계속 진행됐어요.
인기스포츠라 할 수 있는 축구와 야구에서 이러한 규칙 변경 의견이 지속해서 제기되는 것은 결국 숏폼 시대에 들어서면서 줄어들고 있는 관심 때문입니다.
MLB는 지난해 올스타전 시청자 수가 약 545만 명으로 2014년 이후 최저 수치를 기록했다고 밝혔습니다. 축구 역시 현재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고 있는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를 제외하면 유럽의 메이저 축구 리그들도 시청률 감소, 관심도 저하 현상을 겪고 있죠.
예전에는 관심도가 줄고, 경기장을 찾는 팬이 줄어들면 선수들 경기력 문제가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올랐어요. 하지만 지금은 경기 시간을 줄이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경기 중 늘어지는 시간만이라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크게 힘을 얻고 있습니다.
1분 이상 보는 것을 지겨워하는 1030세대가 많아진 상황에서 한 경기에 90분 이상 소요되는 축구나 최소 3시간 넘게 소요되는 야구 경기를 끝까지 보는 사람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죠.
앞서 승점 규칙 변경을 제안했던 피케는 한 팀당 7명, 총 경기 시간 40분으로 기존 축구 규칙과는 매우 다른 ‘킹스 리그’를 2022년 창설했습니다. 가장 최근 대회는 올해 1월에 열렸는데, 한국팀 감독으로 인기 스트리머 감스트가 발탁돼 화제를 모았습니다.
선수 규모·시간 축소 외에 킹스 리그는 옐로카드 2분 퇴장, 무제한 교체, 오프사이드 규칙 없음. 이외에 팬들 투표로 히든 룰 추가 등 이색 규칙들도 이목을 끌었죠. 이에 이벤트성 소규모 대회로 시작했던 킹스 리그는 인기가 높아지며, 200만 명이 넘게 경기를 시청했고 직원도 초창기 10명에서 지난해 말 200명으로 대폭 늘어났죠.
킹스 리그만큼의 변화는 아니지만 국제축구연맹(FIFA)도 규칙 개정으로 좀 더 다이나믹한 축구 경기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FIFA와 IFAB는 6월 개막하는 2025 클럽 월드컵에서 ‘골키퍼 8초 룰’을 시행하기로 했어요. 골키퍼가 8초 이상 공을 소유하고 있으면, 상대 팀에게 코너킥 기회가 돌아가는 것으로, 후방에서 지나치게 시간을 끌어 경기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행위를 방지하려는 조치입니다.
한국프로야구 KBO리그는 경기 규칙 변화 외에도 숏폼을 활용한 마케팅을 적극 이용하고 있습니다. 경기 하이라이트를 비롯한 각종 야구장 영상을 40초 미만의 숏폼을 통해 온라인상에 소개했고, 이것이 적중해 2030 여성들이 경기장을 찾게 만들었죠. 그 결과, 지난 시즌 KBO리그는 사상 처음으로 단일 시즌 1000만 관중 돌파에 성공했어요.
이외에도 KBO리그는 올 시즌부터 연장전을 기존 12회에서 11회로 줄여 최대 경기 시간을 줄이고, 투수의 투구 간격을 주자 없을 때는 20초, 있을 때는 25초로 제한하는 ‘피치 클록’ 제도를 정식 도입했죠.
아직은 메이저 스포츠 업계가 실제 경기 시간을 줄이고자 하는 움직임보다는 경기 중 지루해질 만한 요소를 최대한 배제해 나가는 식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주로 보입니다. 하지만 숏폼 시대가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전후반 60분 축구, 정규리그 연장전 제도가 폐지된 야구 리그를 볼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