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관치보다 무서운 '정치금융'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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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이 또 은행들을 들쑤시고 있다. 명분은 민생이나, 속내는 선거다.

올해 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자당 의원들과 은행장들을 불러 모은 데 이어 이번엔 국민의힘 의원들이 같은 방식으로 은행장들을 소환했다.

당시 민주당의 행보를 선거운동이라고 비판하던 국민의힘이 정작 똑같은 행태를 반복했다는 점은 입맛이 쓰다. 표면적으로는 '서민금융'과 '민생경제'를 위한 소통이라고 포장했지만 은행권의 반응이 싸늘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정치권이 필요에 따라 은행장들을 호출하고 선거철마다 '민생'이라는 명분 아래 생색내기 쇼가 반복되는 현실이다.

최근 정치권의 은행 들쑤시기는 더욱 노골적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각종 대내외 악재로 자동차, 배터리,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한국 주력 산업들이 힘을 못 쓰는 상황에서도 은행만이 실적 잔치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4대 금융지주(KBㆍ신한ㆍ하나ㆍ우리)의 당기순이익은 16조4205억 원으로 전년 대비 1조4090억 원(9.3%) 증가했다. 사상 최대 기록이다. 특히 이자 이익만 41조 원이 넘는다. 올해 1분기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 결정으로 전(全) 산업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서도 4대 금융지주는 5조 원에 육박하는 당기순이익을 거둬들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현실은 포퓰리즘으로 먹고 사는 정치권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잇감이다. '이자 장사'라고 은행권을 압박하는 동시에 이를 활용해 각종 정책 명분과 선거용 메시지로 활용하고 있다.

은행권이 예대마진, 즉 금리 차를 이용해 최근 높은 이익을 거둬들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금리, 경기 침체로 인해 서민들이 고단한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다만 고금리 장사만을 문제 삼으며 은행에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부동산 시장 불안과 정부의 정책 실패 등 구조적 원인에 대한 언급도 없이 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치권이 은행에 손을 내밀면서도 한편으로는 규제 강화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발의된 법안만 보더라도 가산금리 산정 기준 공개, 영업점 폐쇄 기준 강화 등 사실상 경영 자율성을 제약하려는 시도가 줄을 잇고 있다. 특히 가산금리 산정 기준 공개는 금융당국에서도 "가산금리는 시장 상황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돼야 한다"며 우려하는 부분이다.

은행은 이윤 창출이 본질인 민간 기업이다. 은행은 금융시장 신뢰를 지탱하고 자본의 흐름을 조정하며 국가 경제의 순환구조를 담당하는 핵심 인프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권이 민간 기업으로서 은행의 본질을 제쳐놓고 경영에까지 개입하려는 것은 분명 위험한 시도다. 더구나 그 이면에 선거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 깔렸다면 이는 '관치'를 넘어선 정치적 겁박다.

정치권의 개입이 금융시장의 방향성까지 좌지우지하는 상황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정치가 개입하는 순간, 자본은 효율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따라 흐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신용 질서는 왜곡될 수 있다.

결국 피해는 국민인 금융소비자와 서민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정치권의 주장대로 가산금리 산정 기준 공개 시 은행들이 우대금리를 줄이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대출금리를 유지하거나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국민 피해를 막기 위한 규제는 필요하지만, 그 목적이 정당해야 하고 방식은 더욱 정교해야 하는 이유다. 선거는 지나가지만 무너진 금융 질서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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