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필요한 때 [데스크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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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선 생활경제부장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대한국민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주문’을 내린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키운 한 어른에 관해 얘기해볼까 한다.

문 권한대행은 1965년 경남 하동의 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너무 가난해 중학교도 겨우 마쳤다. 그러다 진주 대아고 입학 후 키다리 아저씨를 만난다. 서울대 졸업 때까지 걱정 없이 공부에 매진, 사법시험까지 패스했다. 이후 감사 인사를 하러 갔더니, 그는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있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닌 이 사회에 갚아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요즘 말로 쿨내 진동하는 이 사람의 정체는 김장하 선생이다. 그의 본업은 한약사다. 1963년 경남 사천에서 한약방을 개업, 2022년까지 60여 년간 진주에서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했다. 그는 재테크 달인도 아니었다. 오로지 좀 더 싼값에 효능 있는 약을 조제해 팔았다. 소문은 금세 퍼졌다. 전국에서 '오픈런'을 마다치 않고, 새벽 기차로 진주역에 내린 이들이 연일 문전성시였다.

김 선생은 그렇게 번 돈을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지원하고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그가 10여 년 간 명신고 이사장으로 있을 당시 일체의 청탁을 받지 않아 애먼 세무조사도 받았다. 하지만 털어도 먼지 안 나는 사립학교였다. 억울함도 잠시, 그는 학교시설을 완비한 1991년에 이르러 110억 원에 달하는 명신고와 인근 부동산 등을 모두 국가에 기부했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300억 원이 넘는 사재다. 그는 학교를 소유하려 설립한 게 아니라,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위해 만들었고 학교가 본궤도에 올라 국가에 기부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그는 수백 명의 고학생들에게 꾸준히 장학금을 지원했다. 장학금뿐만 아니라 지역 언론 독립(진주신문 발기인), 형평운동(백정해방에 뿌리둔 인권운동), 환경 보호(지리산·진주 남강 지키기), 여성인권(호주제 폐지·진주여성가정폭력피난센터 설립) 등 다양한 분야에 기부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도왔다. 한국어사전에 있는 뜻 그대로의 독지가(篤志家)다. 평소 김 선생은 “돈은 똥과 같다. 모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세상에 뿌리면 거름이 된다”고 말한다. 그 흔한 자동차 한 대 평생 소유한 적이 없다. 매일 집과 한약방을 걸어서 다녔고, 조금 먼 거리는 자전거로 오갔다. 옷 한 벌 허투루 사지 않아, 속감이 다 해진 양복을 몇 년 째 입는다.

한 번은 성인이 된 장학생 한 명이 찾아와 “선생님이 도와주셨는데 평범한 인물이 돼서 죄송하다”고 말하자,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다”면서 격려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후원한 장학생들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면서도 일체 어떠한 요구나 간섭도 하지 않았다. 어떤 인물이 되라고 말한 적조차 없다. 그러면서도 장학생 소식을 뉴스나 신문에서 보면, 꼭 전화해 “나 김장하다. 좋은 일 했네. 잘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그의 일대기나 평전을 읽고 알게 된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여러 선행에 대해 알려고 들면, 입을 꾹 닫기로 유명했다. 그러다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퇴임 기자, 김주완 씨가 거의 매일 찾아간 덕분에 ‘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만들어진’ 2부작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탄생했다. 2022년 말~2023년 새해에 걸쳐 MBC 경남이 방영한 이 다큐는 지역 지상파방송 최초로 백상예술대상 작품상까지 받았다. 극장에서 개봉되기도 했다. 지금은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으니 완전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4일 헌재 결정 이후 문 권한대행이 궁금했고 그를 키운 김 선생도 궁금해 결국 넷플릭스에 접속했다. 2시간여 눈물 콧물 짰더니 이내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새 대통령을 맞이할 때가 오지만, 진정한 ‘어른’이 부재한 탓일까. 한때 선생·어른으로 불렸던 이도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나니, 아들 비리와 주변 비리의혹으로 세간의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었던 탓일까. 6월 3일 투표장을 나서는 미래 세대에게 과연 다음 대통령은 어떤 어른으로 기억될 것인가. 그와 관련된 또 한편의 울림 있는 휴먼 다큐가 탄생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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