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 금액 ‘불분명’…패소하거나 감정 장기화
무단 유출 피해 ‘남매의 여름밤’
가정적 수익 입증 못해 1심 패소
‘신과 함께’ 특수효과 업체 피소
용역비 감정에만 12개월 이상
K콘텐츠 산업 규모가 커짐에 따라 법적 분쟁이 증가하는 추세지만, 막상 소송에 돌입하면 누가 봐도 이길 것 같은 재판에서 지거나 재판이 하염없이 늘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19일 법조계는 콘텐츠 참여주체 간 손해와 이득을 다투는 법적 분쟁에서 이 같은 사례가 나오는 것은 구체적인 손해배상 금액을 정확히 책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금전 외 부가가치 창출효과가 큰 문화산업 특성상 관련 손해를 ‘금액’으로 환산해 책정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다.
2020년 개봉한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연출한 윤단비 감독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부산 국제영화제·서울 독립영화제·네덜란드 로테르담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는데 이후 호주 한국문화원을 통해 상영되는 과정에서 토렌트를 비롯한 온라인 다운로드 플랫폼에 무단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불법 다운로드 횟수만 18만 회에 달했다.
윤 감독은 보안책임을 다 하지 못한 배급사에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2022년 해당 배급사가 위임받은 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원고 패소’로 결정했다. 재판부는 원고인 윤 감독 측이 구체적인 손해금액을 산정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윤 감독 측은 소가로 2억5000만 원을 제시했다. 이는 당시 영화표 1장 가격인 1만2000원에 다운로드 횟수 18만 회를 곱한 금액 중 일부를 청구한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영화를 불법 다운로드 받은 이들이 극장을 찾는 적극적인 관객과 동일한 비용을 지불했을 것이라고 가정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불법 다운로드에 따라 입은 정확한 손해 금액을 측정해야 비로소 손해배상금을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액수 증명이 곤란한 성질일 경우에는 액수를 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 등 간접자료가 제출돼야 하는데 전혀 제출되지 않아서 손해액을 산정할 수 없다”는 이유를 명시했다.
이 사건 법률대리를 맡은 양규응 법무법인 봄 변호사는 “만약 영화가 유출되지 않았더라면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이라는 ‘가정적 수익’을 입증해야 하는데 누가 듣더라도 ‘그 정도 손해가 충분히 생길 수 있었겠구나’ 하고 납득할 만한 자료를 제시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항소심에서는 웹하드, 인터넷 TV(IPTV)에서 정상적으로 다운로드 받았을 때 발생하는 수익을 토대로 사실조회 등을 거쳐 손해배상액을 입증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올해 7월 항소한 윤 감독 측은 현재 서울고법 제5-2민사부에서 2심 재판을 치르고 있다.
손해배상 금액을 정확히 감정하는 과정 자체에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 문제도 있다. 재판이 장기화하는 것이다.
‘신과 함께’ 시리즈(2017~2018)를 비롯해 ‘백두산’(2019), ‘미스터고’(2013) 등 국내 영화의 첨단 특수효과(VFX)를 전담 제작한 덱스터 스튜디오는 지난해 6월 원고 A 씨가 제기한 용역비 소송에 피소됐다. 하지만 그해 12월 이후 현재까지 1년간 재판이 열리지 않고 있다.
원고 A 씨가 지급하라고 청구한 용역비 6000여만 원이 적정한지 검증하기 위한 감정 기간 동안 재판이 ‘잠시 멈춤’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수효과 영상 제작이라는 전문 업계에 종사해온 원고 A 씨가 언제 어떻게 얼마만큼의 용역을 제공했는지, 그에 따른 용역비는 얼마인지 등을 법원과 법률대리인이 자체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통상 감정이 필요한 사건의 경우 원고와 피고 양측에서 원하는 감정인을 신청하고 이를 법원이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의료사고나 교통사고와 마찬가지로 콘텐츠 분쟁 역시 업계 특수성과 전문성에 따른 복잡한 사안을 들여다봐야 하고, 정확한 감정 결과가 나와야 재판이 재개될 수 있는 만큼 소송 기간 자체가 장기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법무법인(유한) 율촌에서 스포츠·엔터테인먼트 분쟁에 관한 송무(訟務)를 맡고 있는 권성국 변호사는 “사안의 복잡성 정도가 케이스별로 다를 수 있어 감정 기간의 길고 짧음을 일률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면서도 “구체적인 개별 소송에서 당사자가 입증 책임을 다했는지가 문제되므로 우리 현행 민사소송법 구조상 불가피한 결론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꽃 기자 pgot@·윤희성 기자 yoonhees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