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은행 영업점 문에 붙은 안내문입니다. 달력이 없다는 걸 수차례 강조하면서 은행 달력의 뜨거운 인기를 체감케 했는데요. 은행의 소소하지만 놓쳐선 안 될 연말 이벤트, '신년 달력 배부'가 벌써 막을 내리는 겁니다.
연말마다 많은 사람이 달력을 받기 위해 은행으로 향합니다. 인기가 높아 영업점 오픈 전부터 대기하는 이들도 있는데요. 명품 패션 브랜드 매장이 아닌 은행 오픈런을 달리는 셈이죠.
그렇게 달력 배부가 시작되자마자 준비해놓은 물량이 동나버렸습니다. 상당수 주요 은행들은 3일을 달력교부일로 정하고 추가 확보한 물량을 재배포했지만, 이마저도 물량이 빠르게 소진됐죠.
스마트폰으로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데 왜 은행 달력을 받냐고요? 과거부터 전해지던 속설 때문입니다. 은행, 증권사처럼 돈이 모이는 곳에서 만든 달력을 집이나 매장에 걸어두면 재물이 들어온다는 내용인데요. 이 같은 맥락에서 한국은행과 한국조폐공사 달력도 인기를 끕니다. 온라인상에선 '한국은행 달력 효험(?)이 끝내준다더라' 등 말도 오가죠. 금융 공공기관의 경우 달력을 대중에 판매하기에도, 대량 제작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어 구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여기에 은행들이 연예인들을 모델로 기용하고, 유명 캐릭터, 작가 등과 협업하면서 젊은 층의 눈길까지 사로잡는 요즘입니다. 수요는 늘었지만 은행이 달력을 찍어내는 발행량은 매년 감소하는 탓에,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달력을 구할 수 없을 지경이죠.
통상 잘파세대 사이 달력은 '시즌그리팅'이 국룰이었습니다. 솔로 가수, 배우, 그룹 등 한 명쯤은 마음에 품고 있는 '덕후'들을 위한 연말 굿즈 세트인 시즌그리팅(시그). 이를 기획·판매하는 소속사마다 구성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달력은 꼭 포함돼 있는데요. 월별로 특별한 콘셉트를 기획해 달력을 넘기는 재미까지 있습니다.
올해도 수많은 연예인이 시그를 냈습니다. 그러나 환영이나 호평과는 다른 반응도 나타나 눈길을 끄는데요. 일각에선 "팬들을 봉으로 보냐"는 쓴소리까지 이어지고 있죠. 시그를 둔 다양한 '말'들을 살펴봤습니다.
시즌그리팅, 이는 영어권 국가에서의 연말연시 인사말인 'Season's Greeting(s)'을 의미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홀리데이 등 같은 인사말이죠. 연하장에 줄곧 쓰인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연말에 예약을 받아 판매하는 다양한 머천다이즈(MD) 상품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는데요. '웰커밍 컬렉션', '웰커밍 키트' 등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특히 아이돌 기획사에서 시그는 주요 이벤트 중 하나입니다. 구성품은 회사마다 다르지만, 달력에 포스터, 포토카드, 포토북, 다이어리 등이 일반적으로 들어가는데요. 겨울을 따뜻하게 해줄 수면양말이나 머그컵, 메시지 카드, 젠지의 필수품(?) 키링, 메이킹 필름 등 미공개 영상이 들어간 DVD, 콘셉트 증명사진 등 다양한 한정 굿즈가 추가로 포함될 수 있습니다. 통상 11월~12월에 예약 판매됩니다.
구성품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요즘엔 4만~5만 원대가 일반적인데요. 저렴한 가격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팬이 이 시그를 손꼽아 기다리고, 출시되면 X(옛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오르는 등 높은 관심을 받곤 하죠.
무엇보다 덕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특별한 콘셉트입니다. 1년에 단 한 번 발매되는 만큼 팬들의 기대는 높고, 회사는 물론 가수도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데요. 참신하면서도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야 하고, 무엇보다 가수의 개성과 이미지까지 녹여내야 한다는 과제가 있죠.
시그를 아이돌 가수만 낸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아이돌 팬덤 사이에서 확산한 문화는 맞지만, 임영웅, 영탁 등 트로트에 기반을 둔 가수, 배우, 심지어는 동물과 캐릭터까지 시그 상품을 출시하곤 하죠. 모두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자랑합니다.
지금은 중국으로 간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도 지난해 시그가 출시됐습니다. 에버랜드와 텐바이텐이 협업해 내놓은 '2024 시즌 그리팅'이었는데요. 푸바오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담은 다양한 사진과 영상을 직접 촬영해 33종의 굿즈를 제작했습니다. 달력부터 앙증맞은 발도장이 찍힌 ID카드, 다이어리, 키링, 쉬폰 포스터 등이었죠. 한정판인 탓에 이를 사려는 팬들이 몰려 텐바이텐 홈페이지가 일시 다운될 정도였습니다.
EBS 마스코트 펭수의 시그도 인기가 높습니다. 지난해 시그는 포토카드, 쿠션 키링, 팝업 카드 등으로 구성됐는데, 곳곳에서 펭수의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어 역시 빠르게 품절된 바 있죠.
대전 대표 빵집 성심당의 시그(?)도 인기가 뜨거운데요. 성심당에선 크리스마스 케이크 판매 시즌에 한정 수량으로 달력을 나눠주곤 합니다. 이 달력 뒷장엔 3만 원 상당의 해피 쿠폰이 붙어 있는데요. 쿠폰으론 매달 무료로 빵을 받을 수 있죠. 중고거래 플랫폼에선 이 달력이 1만 원 안팎에 재거래되곤 합니다. 올해는 23일부터 25일까지 3일간 성심당 전 매장에서 3만 원 이상 구매한 방문 고객을 대상으로 달력을 나눠준다는데요. 딸기시루뿐 아니라 15겹 크레페, 딸기 타르트 등 다양한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준비돼 있어, 이번 성탄절에는 대전 여행을 계획해 봐도 좋겠네요.
올해도 수많은 스타의 시그가 쏟아졌습니다. 이 중에는 팬들뿐 아니라 머글(팬이 아닌 일반인)들의 눈길까지 사로잡은 것도 있는데요. 온라인상에선 "찐(진짜) 팬은 아니지만 살 수밖에 없었다", "내 돌(아이돌) 소속사가 본받았으면 좋겠다" 등의 호평이 이어지기도 했죠.
'포토카드 혜자'로 잘 알려진 그룹 뉴진스는 이번 시그에서도 포토카드를 뿌립니다(?). 52장의 포토카드로 이뤄진 포토카드 세트가 포함돼 있고요. 표지에 멤버들의 필체가 담긴 폴더 세트, 탁상 달력, 연력 포스터, 다이어리, 포토북, 미니 포스터, 스티커 세트 등 다양한 굿즈도 더해졌습니다. 시그의 테마는 '요정협회'입니다. 버니즈(팬덤명) 몰래 뉴진스 요정들이 수행하는 임무들, 뉴진스 요정들이 직접 진행하는 인터뷰, '2024년 올해의 요정'까지. 뉴진스만의 키치하면서도 청량한 분위기가 가득해 머글 사이에서도 "포토북 2개에 포카가 52장? 대박 구성", "노래만 듣는 라이트 팬인데 바로 구매했다" 등의 호평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수 겸 배우 아이유의 시그도 네티즌 사이 화제가 됐습니다. 탁상 달력에 다이어리, 포토북, 포토카드 등 기본적인 구성품뿐 아니라 퍼페추얼 캘린더, 키캡 키링처럼 참신하면서도 귀여운 굿즈를 포함시킨 건데요. 아이유의 공식 팬클럽 유애나 7기 캐릭터인 '럭끼'가 을사년, 뱀의 해를 맞아 뱀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구현돼 눈길을 끌었습니다. 적지 않은 덕후들이 "알차면서도 귀여운 구성"이라고 입을 모았죠.
배우 변우석의 시그는 티저 공개 때부터 화제를 빚었습니다. 변우석 특유의 맑고 청량한 이미지가 가득 담긴 사진들이 줄줄이 이어졌기 때문인데요. 팬들 사이에선 "감다살"(감 다 살았다), "미감 대박이다", "배우판 레전드" 등 극찬이 나오고 있죠. 여기에 변우석이 모델 출신인 만큼, 빈티지한 콘셉트를 제대로 소화했다는 호평도 나옵니다. 변우석의 시그는 탁상 달력, 다이어리, 필름 북, 포토카드 세트, 북마크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메이킹 필름을 볼 수 있는 QR코드는 추억의 플로피 디스크에 들어가 있어 '20세기 감성'을 제대로 보여줬죠.
박보검은 시그에서 운동선수로 변신했습니다. 포토북과 함께 다이어리, 데스크 캘린더, 월 캘린더, 포스트 카드 등으로 구성된 시그에서 가장 높은 관심을 받는 건 152장으로 구성된 포토북입니다. 테니스부터 야구, 아이스 하키, 태권도, 펜싱, 사격, 농구, 복싱, 양궁 등 다양한 운동선수가 된 박보검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네티즌 사이에서는 "내 돌이 해줬으면 하는 콘셉트를 배우가 하다니", "소속사도 배우도 열일한다", "시그 맛집" 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죠.
이밖에도 그룹 에이핑크, 비투비, 몬스타엑스, 에이티즈, 아이브, 빌리, 제로베이스원, 츄, 임영웅, 영탁 등이 시그를 출시했습니다. 예쁜 디자인은 물론 실용적인 굿즈가 쏟아져, 어느 시그를 살지 고민하는 것도 일이었죠.
그러나 이 과정에서 팬들의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습니다.
우선 가격 얘기가 빠질 수 없습니다. 올해 예약 판매를 받은 시그들은 통상 4만~5만 원대의 가격을 형성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언제 시그의 가격이 이 수준으로 오른 거냐"고 혀를 내둘렀는데요. 고물가 시대라지만, 지류 구성품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 비용부담의 압박이 덜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죠.
시그는 아이돌 팬덤에선 이를 구매하면서 연말 분위기를 내고 새해를 준비하는 일종의 문화로까지 자리 잡은 상황입니다. 문제는 한정 판매되는 상품이라는 건데요. 특정 기한이 지나면 판매를 종료하는 데다가 판매 기한 내 품절될 수도 있어 팬들 사이엔 발 빠르게 구매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조성됩니다. 이 같은 전략이 소비자를 향한 상업적 압박으로 작용한다는 거죠. 시그가 팬덤 문화를 상업화하는 또 하나의 요소일 뿐이라는 취지입니다.
여기에 기획사 내 아티스트가 여러 팀인 경우가 숱하다 보니 '차별 논란'까지 나옵니다. 소속사가 같은데도 아티스트들마다 시그 디자인, 구성, 콘셉트 등이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지적이죠. 팬들의 목소리가 높아질 경우 '불매' 움직임까지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되는 사안입니다.
최근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가 된 시그들은 하나같이 "돈이 아깝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가수라도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구매하지 않고, 찐 팬이 아니더라도 마음에 들면 기꺼이 지갑을 여는 게 요즘 덕후들인데요. 은행들과 비(非) 엔터테인먼트 기업들 등 수많은 곳에서 신년 맞이 굿즈를 선보이는 요즘, 엔터테인먼트사들도 더욱 분발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