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2. [르포] 최악 가뭄에 '비상' 걸린 파나마운하 가보니
바닥 드러나 110년만에 통행 제한…통행료도 수직 상승
강수량 변화 예측 못해 운영 애로...운하 정책 전면 수정
전체 길이만 80km에 달하는 세계 물류의 대동맥, 파나마운하. 태평양을 횡단해 온 7만 톤(t)급 거대한 선박이 갑문으로 접근해 오자 운하청 관계자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육중한 선체가 느릿느릿 물살을 가르며 갑문 앞에 멈춘 순간 수로 틈새에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근 가툰 호수(Gatun Lake)에서 끌어다 온 담수다.
하지만 지난해 상황은 아찔했다. 지난해 가툰 호수는 심각한 가뭄으로 밑바닥을 드러냈다. 파나마운하의 보조 저수지 역할을 하는 인공호 알라후엘라 호수(Lake Alajuela)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중순 본지는 기후변화의 직격타를 맞은 파나마 운하를 직접 찾았다. 최근 강우량 부족으로 선박 통행 제한까지 내려졌던 파나마 운하는 이집트 수에즈운하와 함께 세계 물류망의 ‘혈맥’으로 불린다. 이곳으로 전 세계 물동량의 5%, 화물선의 40%가 지나간다.
8월 12일(현지시간) 오전 8시 30분쯤 중국 국적의 곡물 수입선이 파나마 운하 미라플로레스 갑문으로 들어섰다. 그걸 지켜보던 대젤 마샬 에스피노자 파나마운하청(ACP)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는 “브라질 근처에서 약 4만 톤의 곡물을 싣고 다시 운하를 통해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선박의 크기·목적·경로를 단박에 파악했다.
향유고래를 연상케 하는 육중한 곡물선이 어느새 갑문 바로 앞까지 바짝 다가와 멈춰 섰다. 선체를 더 높이 띄우기 위해 수로 틈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젤 마샬은 “수로 바닥과 옆면에 뚫린 지름 1.5~2m의 구멍 120개에서 터널에 저장된 물이 뿜어져 나온다”며 “모두 가툰 호수와 바닷물을 끌어당겨 저장한 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연신 휴대폰에 내장된 온라인 시스템으로 선박 통행 상황을 모니터링했다.
‘온라인 예약 시스템’은 이상기후에 대응하기 위해 운하청이 선택한 정책 중 하나다. 지난해 말 최악의 가뭄으로 파나마운하는 통행 선박 수를 평소의 60% 수준으로 줄였다. 그로 인해 선박 수백 척이 운하 근처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발이 묶이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통행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해 운하청은 업무 전산화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파나마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의 95%가 온라인 예약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고 운하청은 설명했다.
파나마운하의 운영이 이처럼 정상화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슈퍼 엘니뇨 현상에 따른 극심한 가뭄으로 가툰 호수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운하의 통행 가능 선박은 지난해 11월 하루 38척에서 22척까지 줄었다. 기존 운하인 파나맥스는 28척에서 16척으로, 2016년 새롭게 지은 네오파나맥스(확장운하)는 10척에서 6척으로 통항 선박 수를 줄였다. 확장 운하엔 무게 제한도 따로 걸렸다. 당시 흘수(draft, 선박이 잠기는 깊이)는 15m에서 13.2m까지 낮아졌다.
운하 업무 경력만 20년이 넘은 대젤 마샬은 “(가뭄 때문에) 통행 제한을 한 것은 110년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엘니뇨 현상으로 1997~1998년도에도 굉장히 심한 가뭄이 들었지만, 그땐 무게(흘수) 제한만 있었을 뿐”이라며 “주민들에게 공급할 식수를 확보하고 운하 운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통행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운하가 가뭄의 영향을 크게 받는 이유는 운영 원리에서 찾을 수 있다. 해수면과 높이 차이가 있는 파나마운하는 갑문 사이에 물을 채우거나 빼면서 선박을 계단식으로 이동시키는데 이때 운하 인근의 가툰 호수와 알라후엘라 호수로부터 공급받은 담수가 쓰인다.
하지만 지난해 가툰호수 주변의 10월 강수량은 1950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파나마운하청에 따르면 지난해 가뭄은 역사상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최악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극심한 가뭄이 찾아오는 주기가 계속해서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1987년부터 파나마운하에서 근무한 제라도 옴베르투 고도이 차바리아 갑문 담당 매니저는 본지에 “최근 몇 년 동안 우기 강수량의 변화를 예상하기 매우 어려워졌다”며 “비가 올 시기에 가뭄이 오고 엘니뇨 현상이 겹치면서 그야말로 기후변화가 가장 극심한 해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운하는 세계 무역의 지표이자 기후 위기가 제기하는 도전의 지표가 됐다”며 “세계 교역의 중심인 파나마 운하는 4400억 달러 이상의 화물 운송을 책임지고 있다. 그만큼 기후변화가 야기하는 모든 결과에 대비하고 도전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후변화가 심각해지면서 라인강에서 미시시피강까지 운송 경로와 수로를 방해하는 기상이변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며 “홍수가 잦아지고 가뭄의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이는 운송 경로를 선택하는 많은 선박과 해양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운하 운영 정책도 급변하고 있다. 저탄소 선박에 우선 예약권을 부여하는 방침도 정해졌다. 전 세계를 오가는 물류 선박이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기후변화의 원인이 되고, 그것이 파나마운하의 운영에 영향을 끼치는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한 근본적 조치다.
파나마운하는 내년 1월부터 ‘녹색 선박 기준’을 통과하는 네오파나막스급 선박에 한해 별도의 슬롯을 제공하기로 했다. 친환경 선박들만 일정량의 통항권 경매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운하 자체적으로 에너지 효율화 기술과 대체 연료를 사용하는 선박들의 통항을 장려하겠다는 취지다.
파나마 정부는 운하 수량이 부족해지는 현상에 장기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마른 운하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른바 ‘복합 운송 건식 운하’다. 운하 운영에 차질이 생기더라도 파나마가 물류 거점 역할을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도로와 철도, 항공까지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최근 멕시코, 코스타리카 등 중미 국가들이 ‘운하 대체 경로를 만들겠다’며 나서는 것에 대한 일종의 대응이기도 하다.
파나마운하는 또 다른 물길 확보를 위해서도 움직이고 있다. 약 20억 달러를 투자해 2030년까지 운하 인근 리오 인디오(인디오 강)에 새로운 댐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댐이 건설되면 가툰 호수에 담수를 보다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된다.
제라도 매니저는 “인디오 강 유역에 댐을 건설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장 실행 가능한 선택지임이 확인됐다”며 “저수지가 지어지면 지난해와 같은 가뭄이 발생했을 때 주민들의 식수를 보장하면서도 통행량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 리스크는 파나마운하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에즈운하도 기후변화를 비롯한 지정학적 리스크로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이 같은 양대 운하의 운영 불안정성이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로 비화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글로벌 물류 병목 현상이 결국 해상운송 시간 증가와 비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데 드는 비용은 평균 약 50만 달러(6억7000만 원) 정도이지만, 지난해 12월 경매에선 약 400만 달러(54억 원)에 입찰한 선박도 등장했다. 평균 3.6일이었던 선박들의 대기시간도 한때 9~11일까지 길어졌다.
강대은 주파나마 대한민국 대사관 경제 전문관은 “연간 850만 톤의 컨테이너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고 있고 170여 개 국가의 약 180개 항로를 운하가 연결하고 있다”며 “파나마운하 물동량의 약 72.5%는 출발지 또는 도착지가 미 동부 멕시코만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운하를 통과하는 주요 품목이 컨테이너, 곡물, 에너지(LPG·LNG) 등인 점으로 보아 기후 변화로 인한 운하 운영 차질은 글로벌 공급망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 전문관은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주요 품목 중엔 컨테이너 이외에 곡물, LPG, LNG 등도 있다”며 “그러다 보니 운하 통행에 제한이 생기면 최종 소비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단가가 올라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파나마시티(파나마)=전아현·김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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