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력 있는 디지털ㆍ탄소중립 경제 창출 목적
미·중 전략산업 퍼주기에 대응 시급 판단
“기업 합병심사 완화해 경쟁력ㆍ규모 키워야”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겸 이탈리아 총리가 9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의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공격적인 신규 투자를 제안했다. 세계 경제 질서가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주의로 재편되면서 각국이 전략 산업에 천문학적인 돈을 퍼주는 경쟁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드라기 전 총재는 이날 유럽의 저조한 생산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150개 이상의 권고안을 담은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개혁을 이행하지 못하면 유럽이 실존적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드라기는 2010년대 초반 EU의 재정위기 당시 과감한 통화완화 정책으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의 부채위기를 막아내고 유로화를 지켜내 ‘슈퍼 마리오’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다. 유럽이 경제적으로 미국과 중국에 크게 뒤처지고 있다는 우려가 고조되는 가운데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으로부터 작년 9월 유럽을 구할 수 있는 보고서 작성을 의뢰받아 1년 만에 진단과 해법을 내놓았다.
그는 우선 EU가 경쟁력 있는 디지털·탄소중립 경제를 창출하기 위해 연간 7500억∼8000억 유로(약 1114조∼1188조 원)의 신규 투자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EU 국내총생산(GDP)의 4.4∼4.7%에 달하는 규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유럽 재건 원조 계획인 ‘마셜플랜’ 규모는 당시 GDP의 1∼2%였다. 미국과 중국 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는 전략산업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유럽의 경제적 고통이 심화할 것이라고 보고 막대한 민관 투자를 촉구한 것이다.
보고서는 전기차를 비롯해 청정기술 제조업체에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면서 전기차 산업에 대한 충분한 투자와 기술 확보 없이 기후목표 달성에만 매몰돼 중국에 시장을 빼앗기고 있는 것에 대한 정책 실패를 꼬집기도 했다.
또 반독점 당국이 기업 인수합병(M&A)을 심사할 때 EU의 혁신을 촉진하고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가령 EU가 2019년 독일 지멘스와 프랑스 알스톰의 합병을 저지하지 않았다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유럽 철강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기술 개발에 거대 자금이 필요한 통신 부분에서는 유럽 기업 간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 등 고조되는 지정학적 긴장에 대처하기 위해 드론·극초음속 미사일·방위용 인공지능(AI) 등 방위산업에 대한 연구자금 지원을 더 늘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안보는 지속 가능한 성장의 전제 조건이라는 설명이다.
드라기는 이러한 정책 제안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유로존 국가들이 연대 보증을 통해 공동명의로 발행하는 채권인 유로본드의 적극적인 발행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보고서 내용 중 일부는 11월 이후 출범하는 ‘폰데어라이엔 2기’ 5년 임기 동안 정책 수립 시 어느 정도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7개국의 만장일치 합의가 필요한 데다 공동채권 등 일부 사안의 경우 EU 내에서 여러 차례 논의됐으나 독일의 반대 등 회원국 간 입장 차가 크다는 점에서 제안을 전부 실현하기에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