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끝에 사망’ KAI 연구원…대법 “정신병력 없어도 사망보험금 줘야”

입력 2024-06-04 12:00수정 2024-06-05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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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정신과 진료 없더라도 자살면책약관 적용 못해”

심리적 부검 통해 다시 심리해야…진전된 大法 판례
우울증상 의심 소견…‘자유의사 결정할 수 없는 상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다 사망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연구원에게 사망 보험금을 지급하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자살 면책약관을 근거로 KAI 연구원 A 씨에게 사망 보험금 지급을 인정하지 않은 원심 판결을 파기‧환송했다고 4일 밝혔다.

▲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전경. (뉴시스)

A 씨는 KAI에 근무하던 중 야근을 마치고 귀가했다가 자신의 집 안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수사 기관은 A 씨가 육아와 회사 업무를 병행하다 업무상 스트레스와 육아휴직 문제가 겹친 것으로 내사 종결했다.

남편이 A 씨를 피보험자로 가입한 보험사에 사망 보험금을 신청했지만, 보험사는 ‘피보험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보험계약 약관을 들어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A 씨의 남편은 근로복지공단이 A 씨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 사례를 제시하며 보험사를 상대로 보험금을 지급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에서는 자살 면책약관의 예외조항 적용 여부를 두고 공방이 오갔다. 해당 약관은 피보험자가 심신상실이나 정신질환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는 보험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예외를 두고 있다.

1심은 보험사에 사망 보험금 1억8900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하지만 2심은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A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거나 상태가 악화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 원고 패소 판결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창원지방법원에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A 씨가 사망 직전에 주요 우울장애 진단받거나 치료받은 사실은 없지만 자살에 이를 무렵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했고, 주요 우울장애 증상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A 씨의 사망은 근로복지공단에서 업무상 재해로 인정됐고 정신보건임상심리사가 작성한 심리학적 의견서에도 A 씨에게 주요 우울장애가 의심된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며 “이러한 사정에 비춰 보면 A 씨 자살에 이를 무렵 주요 우울장애를 겪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망에 이르게 됐을 여지가 없지 않다”고 봤다.

망인이 사망 전 정신과 진료를 받거나 진단을 받은 경우에는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는지 판단할 자료가 있으므로 자살 면책약관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볼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이 사건과 같이 망인이 생전에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은 경우에는 그 증명이 없어 보험금 청구가 기각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망인이 비록 생전에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부검 등을 통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는지 여부를 심리해야 한다고 판단함으로써 일보 진전된 판례라고 볼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박일경 기자 ek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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