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 석유화학의 파고, 디지털로 넘어라

입력 2024-06-04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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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이 한 시대를 열 기세였다. 목재, 금속, 세라믹 재질들이 값싸고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대체되었다. 해외 출장 다녀온 친구들이 명품 소재를 아침마다 필자의 책상에 던져 놓으며 분석하여 저녁에 성분을 알려줬다. 소재 기술자들은 분석 결과에 근거하여 온갖 첨가제를 버무려 유사 제품을 만들어 냈다.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으로 번 돈은 농약, 화장품, 제약, 전자 소재에 투입되었다.

현금을 창출할 줄 알았던 석유화학이 최근에 힘들어한다. 중국이 설비를 증설하여 자급자족하고 원유 생산국들이 정유산업과 석유화학산업까지 뛰어들면서 우리나라와 경쟁하기 때문이다. 롯데케미칼은 2년 동안 1조1000억 원 적자를 기록하였고 LG화학도 석유화학 부문에서 14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정부에서는 구조조정 정책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한국이 석유화학에 뛰어들 때 위기를 느낀 일본이 취한 방식이다.

美 다우·獨 바스프, 특화소재로 앞서가

플라스틱 수익으로 투자했던 배터리나 OLED 산업은 그나마 다행이다. 현재의 이익과 손해에만 얽매이지 말고 냉정하게 화학산업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화학산업은 원유에서 시작된다. 1단계는 원유를 증류하여 경유, 휘발유, 나프타, 등유로 분리하는 정유산업이다. 2단계는 분리된 나프타를 분해하여 에틸렌, 프로필렌 등을 얻는 분해 공정이다. 3단계는 원료로부터 다양한 화학물질을 합성하는 정밀 화학과 신소재를 만드는 배합화학이다. 원유 한 방울도 나지 않는 우리나라는 원유를 수입하여 총 3단계의 화학산업을 일구어냈다. 반도체, 자동차 다음으로 화학산업의 수출 비중이 높았다. 이제 중동, 중국, 동남아가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원료에서 주산물로 변하는 화학공정에서 부산물도 함께 나오므로 화학은 수직 계열화를 추구한다. 그중에서도 나프타 분해 공정은 계열화의 핵심이다. 당장 손해가 나지만 우리나라도 나프타 분해 공정을 포기하기 어렵다. 하나의 타협안은 계열화 단위를 회사 차원이 아니라 지역 차원에서 확보하여 여수, 울산, 대천에서만 운영할 수 있다.

경기가 살아나면 석유화학도 회복되니 기다리자는 전략은 소극적이고, 관세를 조정하여 화학산업을 살리는 전략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우리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낡은 산업방식을 버려야 한다. 고품질에 내구성이 있는 제품으로 승부해야 한다. 필자는 주말에 농사를 짓는데 비닐하우스 수명은 5년 정도이고 유리 대용인 투명 폴리카본네이트는 비싸다. 특화된 물질과 소재를 적용할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물량은 적지만 특화된 화학물질은 비싸게 받을 수 있고 경쟁도 덜하다. 미국의 다우, 독일의 바스프는 특화 소재로 이미 앞서 있다.

인류 문명을 구분 짓는 소재 개발은 쉽지 않다. 원료를 무작위로 배합하여 성능을 찾는 방식은 속도가 느리다. 소재의 미세구조를 알고 상호작용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소재의 구성 요소인 분자를 다루는 기술이 요구된다. 분자는 원자라는 공과 원자 사이의 막대로 표현되지만, 원자는 너무 작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학교 주변의 인형 뽑기 기기처럼 조금만 어긋나면 스위치 조작은 허탕이다.

분자의 거동은 양자역학으로 기술된다.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산물이지만 양자역학이 가장 많이 적용된 대상은 분자이고 화학이다. 대부분의 화학 현상은 양자역학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어렵고 기초부터 배워서 적용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아직도 많은 화학자가 양자역학보다는 화학 현상의 경험적 규칙을 찾는다. 경험적 규칙이 발견되면 그제야 양자역학은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이론적 소재 연구’ 전문가 양성해야

이제 적용하기 쉬운 양자역학 프로그램이 나오고 컴퓨터의 성능도 막강하다. 실제 합성하지 않고도 분자의 특성을 예측하여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될성싶은 분자만 합성하면 된다. 여기에 화학의 경험적 지식을 모두 습득하여 분자의 특성을 예측하는 인공지능까지 나타났다. 디지털 화학으로 길이 열렸다. 소재를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전문가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처럼 화학 소재를 혁신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원가 절감이나 연장 근무로 이익을 내던 경영으로 석유화학의 파고를 넘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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