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갑작스레 들려온 황망한 부음에 온 세상이 얼어붙는 듯 가슴 에이는 슬픔이 밀려옵니다. 대한민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재계의 큰 어른을 이렇게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과 허전함을 이루 표현할 길 없습니다. 언제나 다정하신 모습으로 후배 경제인들을 품어주시던 회장님의 온화한 미소가 벌써부터 그리워집니다.
회장님은 ‘기술 한국’의 위상을 높인 경영인이셨습니다.
시대를 앞서가신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로서, 기업은 기술로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원천기술 개발에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보여주셨습니다. 1971년 설립하신 효성기술연구소는 국내 최초의 민간기술연구소이자 기술경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스판덱스’ 등 첨단 섬유의 원천기술 확보와 미래 산업의 쌀이라는 탄소섬유의 독자개발을 통해 ‘기술 한국’의 면모를 전 세계에 각인시킨 회장님의 공로를 기억합니다.
특히 회장님은 위기를 기회로 바꿔낸 ‘뚝심의 경영인’이셨습니다.
IMF 외환위기를 맞아 모두가 비용절감에 매달리던 시절에 회장님은 “투자가 곧 경쟁력”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위기에 굴하지 않고 공격적인 투자를 지속하셨고, 해외생산과 공급망 확대에 주력하여 오늘의 글로벌 소재기업을 일궈내셨습니다. 값싼 개도국 제품의 범람으로 쟁쟁한 경쟁업체들이 사업을 접을 때에도 품질개선에 투자하여 세계적인 프리미엄 제품을 내놓으셨습니다. 이러한 뚝심 경영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견인하는 신소재 산업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회장님은 항상 ‘국민 모두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진정한 경제인이셨습니다.
전경련(現 한경협) 회장으로 재임하시던 때에 저희 후배들에게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국민의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그것이 곧 우리 경제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기존 직원들의 임금을 동결하며 신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잡 셰어링(Job Sharing)’을 맨 먼저 주창하셨습니다. 모두가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회장님의 호소에 많은 기업이 동참했고, 그 결과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수만 명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동안에도 우리나라는 30대 그룹의 종업원이 오히려 9% 늘어나는 기적을 일궈낼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민간외교의 선두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셨습니다.
수십년간 효성그룹을 이끄시면서도 전경련과 한일경제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경제외교관을 자청하셨습니다. 2000년 회장님이 주재한 한미재계회의에서 처음 한미 FTA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7년 뒤 FTA 타결 당시에도 회장님은 양국 간의 가교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미 양국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 비자면제가 필요하다고 미국을 설득하셨던 회장님의 노력은 2008년 우리나라가 미국의 비자면제 대상국에 포함되는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한일 비즈니스 서밋과 같은 한일 재계 지도자가 만나는 자리를 만들며 껄끄러웠던 양국간의 경제교류 확대를 주도하셨습니다. 또한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회장을 역임하시며 서울 총회를 유치하여 대한민국의 대외 위상을 높이셨습니다. 한국경제의 글로벌화를 위해 애쓰신 회장님의 이러한 노력은 후대 기업인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회장님은 “나라가 살아야 기업 또한 살 수 있다는 일념으로 살아오신 분”이라는 평가를 받아 오셨습니다. 회장님과 이별하는 오늘, 회장님의 일평생을 감히 이 짧은 말 한마디로 함축해봅니다.
지금 한국경제는 많은 난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할 위기의 시기에, 나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당장의 이윤보다 국민 모두를 위했던 회장님의 구국(救國)의 리더십이 더욱 절실하기만 합니다.
비록 회장님은 떠나셨지만, 그동안 뿌리신 미래의 씨앗은 한국경제의 번영과 발전이라는 거목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한평생 국리민복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오신 회장님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우리 경제인들은 대한민국 경제가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무거웠던 고뇌를 내려놓으시고, 부디 편히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