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그래미 어워즈’ 최고 영예의 주인공이 공개됐습니다. 미국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66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네 번째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트로피를 들어 올리면서 그래미의 새 역사를 썼습니다. ‘올해의 앨범’을 네 번 수상한 건 스위프트가 최초입니다.
스위프트는 앨범 ‘미드나이츠’(Midnights)로 그래미 어워즈 ‘제너럴 필즈’(General Fields·본상)에서도 최고 영예로 여겨지는 ‘올해의 앨범’과 함께 ‘베스트 팝 보컬 앨범’까지 2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는데요.
그는 2022년 10월 발표한 이 앨범을 통해 ‘안티-히어로’(Anti-Hero)와 ‘카르마’(Karma) 같은 히트곡을 배출했을 뿐 아니라, 그라모폰(그래미 트로피)까지 품에 안음으로써 상업적 인기와 음악성을 모두 갖춘 당대 최고의 팝스타라는 사실을 입증했죠.
스위프트는 작년 한 해 동안만 음반, 저작권료, 콘서트, 굿즈 등으로 18억2000만 달러(약 2조4000억 원)를 벌어들였습니다. 월드투어 ‘에라스 투어’로는 매출 10억 달러(약 1조3000억 원) 이상을 올렸는데요. 사회적 파급력도 엄청났습니다. 그가 공연한 지역에서는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뜻에서 ‘테일러노믹스’(Taylornomics)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고요.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게시물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자, 하루 만에 신규 등록한 유권자가 3만5000명 늘기도 했습니다. 미국 대선 주자들도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거나 맹공을 퍼붓고 있죠. 테일러는 연예계 인물 최초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작년 ‘올해의 인물’로 단독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그래미가 완벽한 결말로 마무리된 건 아닙니다. 백인 가수들에게 주요 상이 집중됐다는 점, 예년과는 달리 K팝 가수들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는 점 등이 아쉬움을 남겼죠. ‘화이트 그래미’라는 지적도 어김없이 나왔습니다.
미국 레코드 아카데미가 1959년부터 매년 여는 그래미 어워즈는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빌보드 뮤직 어워즈와 함께 미국의 3대 대중음악 시상식으로 꼽힙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높은 권위를 자랑하는 대중음악 시상식으로 통하는데요. 레코딩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이 한 해 가장 뛰어나고 성공적이었던 아티스트, 프로듀서, 음반, 음원 등에 상을 수여합니다.
올해 시상식에 가장 많이 후보로 오른 아티스트는 싱어송라이터 시저(SZA)입니다.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레코드를 포함해 총 9개 부문에 수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죠. 빅토리아 모넷, 존 바티스트, 보이지니어스, 빌리 아일리시, 올리비아 로드리고, 테일러 스위프트 등이 수상 후보 명단에 포함됐습니다. 퍼포머로는 올리비아 로드리고, 빌리 아일리시, 두아 리파, 트래비스 스콧, 버나 보이, 조니 미첼, U2, 빌리 조엘 등이 나섰죠.
올해 그래미에선 스위프트를 필두로 여성 아티스트들의 저력이 빛났습니다.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에 마일리 사이러스의 ‘플라워스’(Flowers),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에 빌리 아일리시의 ‘왓 워즈 아이 메이드 포?’(What Was I Made For?), 신인상에 빅토리아 모네 등 주요 부문 트로피를 여성들이 휩쓴 겁니다.
또 피비 브리저스가 이날 가장 많은 4개의 그라모폰을 품에 안은 것을 비롯해 보이지니어스·시저·빅토리아 모네가 각각 3관왕, 빌리 아일리시·마일리 사이러스가 각각 2관왕에 오르는 등 주요 다관왕도 모두 여성이 차지했는데요. 남성 아티스트 가운데에서는 3관왕에 오른 래퍼 킬러 마이크 정도가 눈에 띄었죠.
그래미는 최근까지만 해도 여성과 유색 인종인 아티스트들에게 인색하다는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카니예 웨스트(예), 비욘세, 드레이크, 켄드릭 라마 같은 아티스트들은 주요 부문 수상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신 바 있는데요. ‘화이트 그래미’라는 조롱이 나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2021년 63회 그래미에선 위켄드가 본상은커녕 장르 부문까지 단 한 곳에서도 후보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당시 위켄드가 “그래미는 썩었다”며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지적이 잇따랐는데요. 그래미는 이때부터 갑자기 비밀위원회를 없애고 후보 선정 방식을 바꿨습니다.
올해 시상식부터는 ‘베스트 아프리칸 뮤직 퍼포먼스’(Best African Music Performance) 부문을 신설, 나이지리아 출신 뮤지션 버나 보이를 무대에 세우는 등 변화를 꾀했는데요. 이번 시상식에서도 어김없이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이날 흑인 음악 산업의 발전에 기여한 자에게 수여하는 ‘닥터 드레 글로벌 임팩트 어워드’를 수상한 제이지는 “한때 수상 결과를 두고 보이콧을 한 적이 있었다”면서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그래미가 더 정확한 시상을 했으면 좋겠다”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그는 아내인 가수 비욘세가 최고상인 ‘올해의 앨범’ 수상을 못 한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상을 뺏겼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는데요. 비욘세는 그래미에서 총 32번의 수상을 일궈낸 최다 수상자지만, 최고 영예인 올해의 앨범상은 단 한 번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미에 대한 아쉬움은 K팝 아티스트들에게도 있습니다. BTS가 대표적인데요. 전 세계를 강타한 히트곡 ‘다이너마이트’(Dynamite), ‘버터’(Butter)는 물론 세계적인 밴드 콜드플레이와의 협업곡 ‘마이 유니버스’(My Universe) 등으로 인기를 구가한 BTS는 2020년부터 3년 연속으로 ‘베스트 팝 듀오 그룹 퍼포먼스’(Best Pop Duo Group Performance) 등 부문에 후보로 올랐습니다. 그러나 트로피는 들어 올리진 못했죠.
지난해 11월 수상 후보 명단이 발표되기에 앞서, BTS를 비롯해 블랙핑크, 트와이스, 스트레이 키즈,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 뉴진스 등 다수의 K팝 그룹은 그래미에 출품한 바 있지만, 이들은 모두 명단에서 빠지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미국의 권위 있는 대중음악 매체 롤링스톤 등은 빌보드 ‘핫100’에 동시에 3곡을 올린 그룹 뉴진스가 ‘베스트 뉴 아티스트(Best New Artist) 부문에 후보로 지명될 수 있다는 등 예상을 내놨으나, 공개된 후보자 명단은 달랐던 겁니다. BTS는 정국의 ‘세븐’(Seven), 지민의 ‘라이크 크레이지’(Like Crazy) 등 솔로곡이 빌보드 ‘핫100’ 1위 등 괄목할 만한 성적을 냈음에도 후보조차 지명되지 못하면서 의문을 자아냈죠.
외신들도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후보자 발표 직후 AP통신은 “TXT, 스트레이 키즈, 뉴진스 등은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하며 그래미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의외의 결과”라고 짚었습니다. 미국 일간지 USA투데이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장르 중 하나인 K팝을 그래미가 놓쳤다. 94개의 부문이 있음에도 확실한 후보자들을 간과했다”고 지적했죠.
K팝 아티스트들은 빌보드 뮤직 어워즈,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등에선 수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유독 그래미에서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건데요. 업계에서는 그래미의 시계가 늦다는 점을 이유 중 하나로 지적합니다.
그래미를 주관하는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에는 오랜 기간 음악계에 몸담았던 백인 중년 남성들이 다수 포진해 있습니다. 유색인종·젊은 층·여성 투표인단을 대거 영입했다고는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이뤄진 일입니다. 그래미가 아이돌 문화에 유독 박하기도 한데요. 한 시대를 풍미하며 각종 트로피를 휩쓴 유명 그룹 뉴키즈 온 더 블록, 백스트리트 보이즈 등도 그래미 수상엔 실패했죠. 즉 BTS가 그래미에서 3년 연속 후보로 오른 건 그래미 나름의 변화이자 고질적 한계라는 겁니다.
최근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뜨거운 감자 중 하나는 ’K팝 위기론‘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폭발적으로 증가한 K팝 시장이 지난해 정점을 찍고 이제 하락세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인데요. 이 주장의 근거로는 앨범 판매량이 주로 거론되곤 합니다.
실로 다수의 K팝 아티스트들의 앨범 판매량은 코로나 팬데믹이 종료된 지난해 5월 중순을 전후로 최고점을 찍고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증권사들이 주요 엔터사들 주가에 대한 부정적 리포트를 내놓으면서 K팝 위기론은 더 확산했고, 이번 그래미 시상식에서 K팝 아티스트들의 후보 지명이 불발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그래미에서 수상하는 유색 인종과 여성 아티스트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K팝은 그래미의 철옹성을 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래미 수상 결과와는 별개로, K팝의 숙제는 결국 ‘질적 성장’이라는 의견도 나옵니다. 그래미 특유의 보수성은 인정하지만, 결과적으로 수상 경쟁을 뚫기 위해선 그래미 기준에 부합하는 음악성도 필요하다는 뜻인데요. 그래미는 직접 곡을 만드는 싱어송라이터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등 음악성에 초점을 맞춰 회원들의 투표로 수상자를 가리기 때문에, 비슷한 장르의 음악을 양산하는 걸 넘어 각 그룹만의 뚜렷한 색을 주도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연합뉴스에 “마일리 사이러스도 이번에 처음 상을 받았을 정도로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팝 가수가 그래미 어워즈 후보에 오르고 수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며 “K팝이 그래미를 노린다면 싱어송라이터로서 주도적으로 제작에 임하고 음악적으로도 좋은 만듦새를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