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국 칼럼] 시장경제에서 ‘운(運)’은 어디까지일까

입력 2024-01-0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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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한국자유주의학회 회장

능력에 비례한 소득이 시장 원칙
경제적 성공을 ‘운 덕분’ 오해 많아
행운을 기회로 포착하는 게 실력
한쪽만 강조하면 증오·질투 유발해

시장경제에서 개인 소득은 재주, 실력, 노력 등 개인의 능력이 소득 격차를 결정한다는 뜻의 ‘능력주의(meritocracy)’에 기반을 둔다. 개인의 소득 차이가 생산활동에 투입되는 노력, 재주 등의 차이에 상응해야 한다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능력원칙’에 따른 분배원칙이다. 기독교적 보수주의를 비롯하여 송복, 박지향 등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소득은 능력에 비례한다는 원칙을 시장사회의 도덕의 본질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그런 보수주의적 관점을 마이클 샌델은 착각이라고 비판한다. 시장사회에서 경제적 성공은 재주 노력 이외에도 ‘운(運)의 덕택’이라는 이유에서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성공한 듯 자만하면서 실패한 사람들을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경멸한다고 한다. 이런 비판은 옳다. 능력주의는 권세가의 거드름을 조장한다는 건 샌델보다도 훨씬 먼저 자유주의자들이 깨달았다. 예컨대, 자유주의의 거두 하이에크는 70년 전에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은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타인의 성공에 대한 질투와 원한에 사무친 나머지 사회가 불안정하다고 설파했다. 부자의 겸손도 강조했다.

우선 주목할 것은 능력주의 자체의 문제다. 자유시장에서 개인의 소득은 능력과 노력 재주와 같이 생산적 투입에 대한 보상과는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방탄소년단’이 인기를 끄는 건 재능이나 노력, 능력 자체가 아닌 노래나 노랫말 또는 춤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할 만한 가치를 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또는 어떤 재주나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노래의 수요자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자유시장에서 개인의 소득은 그의 공급이 수요자들에게 주는 가치에 비례한다는 ‘성과원칙’은 자유주의의 현대적 버전이다. 샌델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는 그런 버전을, 재분배 옹호론을 차단하기 위한 이론적 전략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틀렸다. 재화나 서비스 공급자의 투입에 비례해서 개인의 보수(報酬)를 정한다면 예컨대, 1시간의 노력으로 맛있는 빵을 만든 사람보다 5시간의 노력을 투입하여 맛없는 빵을 굽는 사람이 더 많은 보수를 받는 온당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존 롤스는 심지어 타고난 능력, 부잣집에서 태어난 것, 남자로 태어난 것도 순전히 행운의 결과이기에 그로부터 생겨난 소득 불평등은 심각한 불의(不義)라고 한다. 그러니까 행운의 여신(女神)으로부터 받은 능력 재주 등은 사적 재화가 아닌 공유재가 원칙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신은 각자에게 행운으로서의 능력을 주었지만, 능력의 내용, 개발 방향, 용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우리가 비로소 발견해야 할 대상이다.

타고난 능력은 순수한 행운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 타고난 재능이 자동적으로 경제적 성공과 연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행운 자체를 기회로 포착하고 수요자들에게 주는 가치를 개발한다면 그런 발견은 결코 순수한 운이라고 볼 수 없다. 지금은 은퇴한 ‘은반의 여왕’ 김연아는 자동적으로 성공한 게 아니라 행운의 재능 자체를 알아내고 계발해 시장성을 최대화한 기업가정신 덕 때문이었던 게 아닌가! 행운을 기회로 포착하여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순수한 운만이 아니다.

요컨대, 자유시장은 실력사회도, 운만이 지배하는 사회도 아니다. 운만이 지배하는 사회는 성실과 노력의 의미가 없어지고 냉소주의가 만연해 퇴폐적으로 된다. 순수한 실력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실패한 자들은 무능 나태 등의 사회적 낙인으로 자괴감에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사회는 부자에 대한 질투와 증오로 가득한, 그래서 불안한 사회다.

다행스럽게도 시장경제는 그런 퇴행적이고 불안한 세계로 진화하지 않았다. 실패를 운의 탓으로 돌릴 수 있기에 패자는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고 승자를 비롯하여 타인들도 낙인찍기보다 ‘너는 능력도 있고 열심히 했지만, 운이 없어 실패한 거야. 더 분발해!’라는 식으로 패자를 위로할 여지도 크다. 시장사회가 분배의 불평등에도 안정적인 이유다. 개인의 성공이 얼마만큼 실력 또는 운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자유 사회에서 부자, 권세가들이 거드름을 피우지 말고 늘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반(反)시장론자와 달리, 자유 사회에서 부자에게 재분배의 법적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행운이라고 해서 개인의 능력이 반드시 공유여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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