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의 자존심을 건드린 美포드…포니 개발의 뒷이야기

입력 2023-05-1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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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는 5도어 패스트백 모델을 기본으로 3도어 해치백, 5도어 타입의 왜건 등 다양한 가지치기 모델도 등장했다. (출처=광고연구원)

미국 포드(Ford)는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이 이만큼 성장하는 데 적잖은 밑거름이 됐다.

기술을 나눠주거나 자본을 투자하는 게 아니었다.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우리 자동차 산업은 여기에 자극을 받고 '전인미답' 시장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질 수 있었다.

1980년대 초, 당시 기아산업은 공업합리화 조치 해제 이후 본격적으로 승용차 시장 재진출을 노렸다. 그렇게 등장한 모델이 소형차 프라이드 1세대다.

일본 마쓰다가 개발하고 한국의 기아산업이 생산한 프라이드는 미국 포드가 '페스티바'라는 이름으로 팔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페스티바로 재미를 본 미국 포드는 다시금 기아산업에 소형 SUV 생산을 제안했다. 당시 화성공장을 준비 중이던 기아산업도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포드의 본색은 뒤늦게 드러났다. 연간 15만 대 수준의 소형 SUV 생산을 기아산업에 맡기는 대신, 기아의 지분을 요구했다. 화들짝 놀란 기아산업은 그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 서둘러 소형 SUV 자체 개발을 시작했다. 1세대 스포티지가 탄생한 배경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로 자동차 역사에 이름을 남긴 포니. 상징적 의미가 남다르다. (출처=광고연구원)

대한민국의 첫 국산차 ‘포니(PONY)’의 탄생 뒤에도 포드가 존재한다. 우리 손으로 만든 고유모델을 추진하던 현대차의 자존심을 포드가 건드린 것이다.

당시 정주영 선대회장은 자동차 회사 포드(FORD)가 한국 진출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빠르게 움직였다. 경제 발전에 대한 비전은 물론 정비소 운영으로 자동차 지식에 해박한 정 선대회장과 포드와의 제휴 협상이 빠르게 이뤄져서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가 설립됐다.

이듬해 현대자동차는 울산에 조립공장을 짓고 영국 포드의 코티나(Cortina) 2세대 모델을 들여와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술력으로 설립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자동차 회사가 공장을 짓고 조립 생산을 시작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현대자동차는 단순한 조립을 넘어 독자 제조 단계에 진입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제휴사인 포드와 새로운 합작사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주요 부품부터 자동차까지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고자 한 것이다.

▲미국 포드는 주요 부품을 한국산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철회했다. 자극을 받은 현대차는 독자적인 고유모델 출시를 결심했다. 그 결과물이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다. (출처=광고연구원)

그러나 이 무렵에 포드의 생각이 바뀌는 사건이 생긴다.

범아시아 진출 계획을 세우고 있던 포드는 중국 진출을 위해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도요타의 행보에 따라 현대자동차와의 합작사 계약 이행을 계속 미룬 것이다.

1971년, 자본금 납부가 늦어지는 데다 주요 부품을 국산화하기로 한 약속을 철회하려는 포드의 태도에 결국 합작사 설립 협상은 결렬됐다. 선진 업체가 제시하는 불리한 조건에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협상이 거듭 실패하자, 이에 지친 현대자동차가 독자적으로 대한민국 첫 대량 양산형 고유 모델을 개발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1971년, 자본금 납부가 늦어지는 데다 주요 부품을 국산화하기로 한 약속을 철회하려는 포드의 태도에 결국 합작사 설립 협상은 결렬되었다. 선진 업체가 제시하는 불리한 조건에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협상이 거듭 실패하자, 이에 지친 현대자동차가 독자적으로 대한민국 첫 대량 양산형 고유 모델을 개발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1975년 마침내 현대자동차의 첫 독자 모델 ‘포니(PONY)’가 시장에 출시된다. 현대자동차 설립 후 10년이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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