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슬람'이 전부라고? 극우파 저서 '프랑스의 자살' 번역한 이유

입력 2023-01-12 15:42수정 2023-01-1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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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살인자, 강간범.” 2020년 프랑스 극우파 정치인 에릭 제무르의 말이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다. 보호자 없이 자국에 들어온 어린 이민자에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은 법적 대가는 기소와 벌금이었지만, 무슬림 이민자에 부정적인 입장을 지닌 일부 시민들에게는 도리어 사회적 환호를 받았다. 에릭 제무르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녹아든 저서 ‘프랑스의 자살’이 2014년 출간 이후 50만 부나 팔리며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이 책 일부를 발췌해 '이슬람을 공격하거나 기독교가 더 우위에 있다는 주장의 논거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8년간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돌아온 이선우 번역가는 에릭 제무르의 세계관이 단편적으로 발췌돼 오독되고 있다는 찜찜함을 느꼈다고 했다.

11일 성신여대 프랑스어문문화학과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에릭 제무르가 단지 반이슬람 발언만 하는 혐오주의자였다면 프랑스에서 그렇게까지 인기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번역을 직접 해 보니 그는 자국민을 걱정하는 민족주의자이자 심지어는 사회주의자에 가까운 면까지 있었다”고 했다. 인용이든 비판이든 “제대로 알고 하라”는 것이다.

좌파의 68혁명, 미국식 자본주의… 모두 프랑스 망쳤다
▲ 11일 '프랑스의 자살'을 번역한 이선우 성신여대 프랑스어문문화학과 교수가 이투데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박꽃 기자 pgot@)

에릭 제무르는 ‘프랑스의 자살’을 통해 현대 프랑스의 근간을 이룬 68혁명을 비판한다. 민족과 국가, 전통적 가부장제를 핵심 가치로 여기는 극우 정치인에게 세계시민주의와 평등, 페미니즘을 내세워 기존의 사회문화 질서를 뒤바꾼 사건이 달가울 리 없다.

의외의 대목은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힐난이다. 책에는 “미국인들은 너무 많이 소비하고 충분히 저축하지 않았다”면서 미국인들의 비만이 “소비 지상주의적 폭식증”의 상징이고, 그들 사회는 “병든 사회”라고 지적한다. 문장마다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안에서 과거의 경제적 부강함과 외교적 입지를 모두 잃은 프랑스를 향한 절절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이 번역가는 “그 부분이 바로 한국 독자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지점”이라면서 “흔히 한국의 우파는 미국식 자유 개념이나 경쟁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를 선호하지만, 에릭 제무르 논의의 시작점은 철저하게 ‘민족’이며 경제 측면에서는 사회주의자에 가까운 면도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실제 까르푸, 르클레르 같은 대형 슈퍼마켓이 인근 상점 일자리를 파괴한다고 비판하고, 르노 자동차가 세계화 물결 안에서 튀르키예, 폴란드 납품업체를 선호해 프랑스 제조업체를 파괴했다고 문제 삼는다. 이 번역가는 프랑스 자국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에릭 제무르의 민족주의적 면모가 한국의 우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강조했다.

원문만 544쪽, 프랑스 법·외교·문화 전방위적 번역에 ‘진땀’
▲2022년 12월 한국어 번역된 '프랑스의 자살'(왼쪽)과 2014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원문(가운데). 프랑스 내에서 에릭 제무르의 주장을 비판하는 논거를 담아 출간된 'Contre Zemmour'(오른쪽 하단). (박꽃 기자 pgot@)

‘프랑스의 자살’ 원문은 544쪽에 달한다. 책 출간을 기획한 틈새책방 홍성광 편집장은 언론인 출신 에릭 제무르의 글을 두고 “지독한 만연체에 주어 동사가 사라진 문장으로 한 문단을 채우기도 한다”고 평가했다. 이 번역가 역시 “지적임을 뽐내려는 느낌이 드는 문장이 많아 최대한 문장을 짧게 끊고 가독성을 높이는 게 중요했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번역된 책은 786쪽, 두께 4cm에 달한다.

그러나 분량보다 독자를 압도하는 건 단연코 ‘깊이’다. 책은 프랑크 왕국에서 EU가 성립되기까지의 역사는 물론이고, 혐오발언을 금지한 1972년의 ‘플레벵 법’, 동성결혼을 한 희극인 출신 자선활동가 콜뤼슈(1944~1986)의 사례, 파리 교외 빈민가 방리유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영화 ‘증오’(1995) 등을 언급하며 ‘프랑스 사람이어야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이 번역가는 “잘 모르는 내용을 구글 검색으로 대조하느라 한 페이지를 붙잡고 2~3시간을 쓴 날도 많다”고 기억했다. 책 하단에 빼곡히 들어찬 각주는 그 자체로 분투의 흔적이다. 종종 저자가 틀리게 기술한 사실관계를 짚어내는 각주의 꼼꼼함에 감탄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이 책을 번역하는데 2022년을 꼬박 다 썼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주장을 새겨 들어야하는 건 아니다. 페미니즘, 성 소수자 이슈 앞에서는 논리보다 감정이 앞서 흥분한 모습이다. 성 소수자 진영과 자본주의가 동맹을 맺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여성이 경제활동을 시작하면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기 ‘때문에’ 가족이 붕괴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있다며 과거를 미화한다. 이 번역가가 책 서문에 “가장 걸러 들어야 할 담론”이라고 꼬집은 이유다.

"이민자 늘어나는 한국에 참고 사례 될 것"
▲프랑스 극우 성향 평론가 에릭 제무르(63)가 2021년 11월 파리 교외 불로뉴 비양쿠르에서 진행된 TF1 방송 인터뷰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그는 이날 차기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공식화했다. '프랑스판 트럼프'라고도 불리는 제무르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비난하며 "이제는 프랑스를 개혁할 때가 아니라 구원할 때"라고 출마 이유를 밝혔다. (파리 AP=연합뉴스)

그럼에도 ‘프랑스의 자살’은 한국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을 거라고 했다. 이 번역가는 “극우파 정치인으로만 알려진 에릭 제무르지만 저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민족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한국의 좌파와도 가깝다”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을 성급하게 좌파나 우파로 정의하는 데 한 번쯤 의문을 갖게 할 것”이라고 했다.

이민자가 늘어나는 국내 상황에서 에릭 제무르의 사례는 일종의 지침이 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이민자의 ‘동화’를 주장하는 그의 성향에 동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성향의 정치인이 왜 프랑스에서 주목받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보다 건강한 대응을 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주장이다.

2022년 대선에서 극우파 정치인 마린 르펜의 득표율은 42%까지 치솟았다. 그의 아버지 장 마리 르펜이 2002년 대선에서 14%의 지지율에 그쳤던 데 비하면 급격한 상승이다. 여기에는 평등과 연대를 말하며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그에 따른 사회적 혼란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현재 집권 세력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도 작용한다.

이 번역가는 “프랑스는 (이민자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시점이 지나버려 계속해서 후회를 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잘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 입장에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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