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승규의 모두를 위한 경제] 한일 관계 개선은 정중동의 자세로

입력 2022-09-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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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오야마학원대 국제정치경제학부 교수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1일 미국 뉴욕에서 ‘약식회담’을 가졌다. 대통령실은 “한·일 간 여러 갈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을 뗐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고 회담 자체의 성과보다는 만남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 것은 2019년 문재인 전 대통령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회담한 지 거의 3년 만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일본 측 발표는 상당한 온도 차가 느껴진다. 일단 우리 대통령실의 ‘약식 회담’이라는 표현에 반하여, 일본 정부는 ‘간담’이라고 했다. 특히 요미우리 신문은,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 해결이 난망한 가운데 정상회담을 실시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며, 다만 한국 측의 관계 개선 자세를 높이 평가하여 비공식 간담 형식으로 응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일본 언론들은 윤 대통령이 어떻게든 만나자고 해서 기시다 총리가 이번에는 응해 줬지만, 다음에는 만나려면 한국 측이 먼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해법을 가져와야 할 것임을 확실히 했다고 전했다.

한국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을 서두르다가, 기시다 총리의 자국 내 선전에 큰 굴욕을 당한 셈이다.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의 우두머리였던 아베 전 총리가 사망한 후, 기시다 총리는 소위 ‘아베파’를 자신의 계파로 포섭하지 못하고 있다. 아베 전 총리가 살아있었을 때는, 아베 전 총리의 동의만 구하면 자민당 전체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안건마다 각 계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본 정치 지형도가 꿈틀거린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관계 개선 노력은 일본 정치 선전에 이용될 뿐이다.

불안정한 일본의 정치 지형은, 자민당에 의하여 제안되었지만 과반수 이상의 일본 국민들이 반대하는 아베 전 총리의 국장을 기시다 총리가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기시다 총리의 불안정한 자민당 내 입지로 자민당에서 제안한 아베 전 총리의 국장을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동적 동기를 넘어서 이번 국장을 계기로 아베파를 비롯 다른 계파들을 포섭하려는 기시다 총리의 적극적 동기가 읽힌다. 즉, 자신이 다른 자민당 유력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베 전 총리의 장례식에 조문객의 한 사람으로서 참석하기보다는, 아베 전 총리의 국장에 상주로서 계승자로서 내외빈과 다른 자민당의 유력 정치인들을 맞이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한일 관계도 아베 전 총리 사망과 그로 인한 일본 내 정치 지형도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아베 전 총리는 재임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과 여러 갈등이 있었고, 급기야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까지 실시했다. 비록 아베 전 총리도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으나, 어디까지나 한국 정부에 갈등의 책임을 지우려는 자신의 기존 입장을 번복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였다. 기시다 총리 역시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함께 2015년 위안부 합의문에 합의한 일본 측 외무대신이었다. 당시 자신이 만든 합의문이 사실상 무효화한 것에 대하여 한국 정부에 책임을 묻지 않고 한일 관계 개선을 추진한다면, 다른 계파들에 의하여 추궁받을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결국 정치적 기반이 불안정한 기시다 내각이 정상회담이나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에게 책임 지우기’라는 아베 전 총리의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빛내 줄 뚜렷한 명분 내지는 성과가 필요하다. 이러한 셈법에서 기시다 내각은 회담의 선결조건으로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해법을 가져오라 요구하고 있다. 아마도 선결조건을 충족시켜 준다면, 그다음은 위안부 합의문 이행을 다시금 요구할 것이다. 실제 일본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위안부 합의문 준수를 요구하고, 그로부터 며칠 뒤 독일에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요구함으로써, 윤석열 정부의 위안부 합의문 제3항에 대한 준수 의지를 시험한 바 있다.

외교의 가장 기본은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기 전에 상대의 입장을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한일 관계 개선을 희망한다 하더라도 상대의 입장을 감안하면 지금은 적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먼저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다가선다면, 일본의 자국 내 정치 선전에 과도하게 활용될 뿐이다. 코로나로 위축된 민간 부문의 교류는 조속히 정상화해야겠지만, 정부나 정치 부문의 관계 개선은 일본 내 정치 지형도가 안정화된 이후로 미루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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