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우 IT중소기업부장
오랫동안 잊고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DJ) 취임사가 요새 문득문득 머릿속을 맴돈다. 단순하게 서민의 기름으로 불리던 경유를 몇 달째 리터(L)당 2000원 넘게 주유하다 보니, 회고의 깊이도 시간도 늘어나는 듯싶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6%에 도달했고 기름값·곡식값·전기요금 등 안 오르는 게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1997년 외환위기(통칭 ‘IMF사태’) ,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작금의 코로나19 후유증까지 이 가운데 무엇이 가장 충격적일까. DJ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 받는 상황을 목이 멘 채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국가와 기업, 가정, 개인 모두가 먹고사는 문제를 놓고 무릎을 꿇었다. 직장에서 잘린 아버지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자식들이 한겨울 평일 낮에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했다. 무료급식소 앞의 긴 줄은 신문의 지면에 등장하는 일상의 모습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는 대침체기였다. 당시 실업률은 수십 년 이래 최고 수준을 향해 치달았다. 주식시장은 사상 최악의 폭락 장세에서 벗어나려 허우적대고 있었다. 거품이 꺼진 주택 시장은 빈사 상태에 빠졌다. 국민은 조직적인 붕괴를 수반하는 위기 상황에서 또다시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했다. 코로나19의 충격은 ‘퍼펙트 스톰’이다. 코로나가 지나갈 조짐을 보이자 인플레이션이 몰려왔다. 인플레이션은 전세금 등과 같이 현금밖에 없는 사람에게는 대재앙이다. 수요와 공급 양면이 동시에 충격을 받고 있다. 내수·수출·고용 등 경제 전반이 어렵다. 장사를 접은 자영업자, 일자리를 잃은 근로자는 먹고사는 문제라는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저마다 사정이 있다 보니, 통상 말하는 10년 주기 경제 위기에서 충격파의 강도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뉴스를 보지 않아도 피부로 전달되는 고물가의 여파는 상당하다.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 기대어 살던 취약 계층은 작은 충격에 와르르 무너지기 마련이다. 요새 끝이 보이지 않게 치솟는 물가 때문에 학교 급식에도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식용유 가격이 올라서 주 2회 제공하던 튀김을 구이로 바꾸고, 육류를 생선으로 변경하는 일이 다반사다. 학교 급식 문제가 이러니, 가정 식탁 물가 문제는 오죽하겠는가. DJ가 “올 한 해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이라는 말이 24년이 지난 오늘도 재연되고 있는 셈이다.
최근 ‘IMF 버금 위기론’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리더십 공백과 진정성이 빠졌다는 점이다. 정부는 매주 민생경제비상회의를 개최한다. 실시간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바로 속보로 내보내고 있지만,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한 가지 예를 들겠다. 지난주 소상공인·자영업자, 청년 등 취약차주를 지원하기 위한 금융정책을 발표했다. 취약층의 부채 부담 완화를 위해 ‘125조 원+α’ 규모의 금융 지원을 통해 부채를 상환 유예에서 경감으로 바꾸는 대책이다. 그동안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취약층의 어려움을 막았다면 이제는 채무 조정 등을 통해 실질적으로 부채 부담을 줄여 재기를 돕겠다는 의도다. 바람직하다.
그러나 구체성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어디서, 얼마나’라는 재원 확보 방안이 없다. 윤석열 정부 첫 세제개편안의 핵심은 ‘감세’다. 따라서 정부가 직접 나서서 재원을 충당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결국 은행이다. 은행들이 스스로 얼마나 적극적인 자세로 취약층 지원이나 관련 금융 상품을 출시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정책의 효과가 결정된다. 그래서일까. 검사 출신 이복현 금감원장이 주목된다. 은행의 ‘이자 장사’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로 그의 존재감은 이미 드러났다.
요즘 정책을 들여다보면 윤석열 대통령도, 한덕수 국무총리도, 추경호 경제부총리도 보이지 않는다. 국민에게 호소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서민의 기름이 리터당 2000원, 짜장면 한 그릇이 8000원이 넘는 시절이다. 어떻게 헤쳐나갈지 진정성 있는 정확한 진단과 해법이 요구된다. ac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