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닌텐도 워와 틱톡 워

입력 2022-03-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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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록펠러센터에 있는 닌텐도스토어의 게이머 라운지에는 닌텐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미니 박물관이 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전쟁의 폐허를 연상시키는 닌텐도의 게임기 ‘겜보이’다.

이 게임기에는 사연이 있다. 이 겜보이는 걸프전이 한창이던 1991년,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미군 막사에서 불사신처럼 살아남았다. 당시는 미국이 유엔 산하 34개 다국적군을 이끌고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와 맞서 싸우던 때다.

겜보이의 주인은 스테판 스코긴스라는 의무병. 그에게 이 게임기는 생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유일한 위안이었다. 스코긴스는 막사가 폭격을 당하자 잔해를 뒤져 게임기를 찾아냈다. 물론 게임기는 케이스가 뒤틀리고 내장까지 다 드러나 못 쓰게 생겼다. 그런데도 그는 수리를 위해 게임기를 닌텐도 본사로 보냈다. 닌텐도 엔지니어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테트리스 카트리지를 끼운 순간 모두 놀랐다고 한다. 폭격으로 녹아내린 게임기가 멀쩡히 작동되는 것이 아닌가. 이 겜보이는 전쟁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지금도 닌텐도 박물관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전쟁영웅 때문에 걸프전이 ‘닌텐도 워(Nintendo war)’로 불리는 건 아니다. 당시 다국적군은 최신 무기로 이라크군을 압도했다. 이때 다국적군의 전투기가 발사한 미사일과 폭탄이 이라크군의 표적에 정확히 명중하는 장면이 마치 비디오게임 화면과 같아 ‘닌텐도 워’라고 불리게 됐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는 ‘틱톡 워(TikTok war)’라는 별명이 붙었다. 소셜미디어에서 전례 없는 세계적인 수준의 정보전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에는 선전이 따라붙는다. 자신들의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명분 때문이다. 그동안은 금융·경제 동결과 사이버 공격이 전세를 좌우했지만, 지금은 여기다 가짜 정보를 퍼트려 여론을 움직이는 ‘정보 무기’가 더해졌다. 이른바 ‘전쟁의 하이브리드화’다.

러시아는 ‘트롤’이라는 전문 부대를 동원해 24시간 내내 수천 개의 가짜 소셜미디어 계정에 가짜 정보를 흘려보내고 있다. 크림반도를 침공한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와 나치를 연결짓는 선전을 활발하게 하더니 이번 침공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나치 정권이 러시아계 주민의 제노사이드(대량 학살)를 기획하고 있다”는 가짜 정보를 국영 방송과 소셜미디어로 유포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미국에서 지원받은 자금으로 생화학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허무맹랑한 러시아의 가짜 정보에 넘어갈 사람은 없다. 오히려 “정보전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승을 거두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쟁 초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해외로 피신했다거나 젤렌스키가 자국 병사와 국민에게 항복을 촉구했다는 가짜 동영상이 퍼졌다. 그러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소셜미디어에 자신이 직접 찍은 영상을 올려 건재함을 보여줬다. 또 소셜미디어를 통해 국제 사회에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다른 게임을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러시아가 이런 지리멸렬한 가짜 정보 공세를 멈추지 않는 건 ‘슬리퍼 효과(sleeper effect)’를 노린 것이다. 사람들은 날조된 정보인 걸 알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거부감이 줄어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짜 정보 확산의 중심에 10억 명 이상의 유저를 거느린 틱톡이 큰 역할을 하고 있어서 더 걱정이다. 이달 초 틱톡에서 300만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한 군용기 이륙 장면은 당초 러시아 군용기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미 해군 소속 군용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우크라이나 폭격 장면으로 600만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한 영상도 사실은 2020년 레바논의 베이루트항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였다. 또 러시아 군인들이 낙하산을 타고 우크라이나에 착륙하는 모습도 실제로는 몇 년 전 것이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최다 조회 수 영상을 최우선으로 노출하는 틱톡의 알고리즘이 가짜 동영상의 확산을 조장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문제는 이런 동영상을 확산시키는 게 악의 없는 일반인이라는 것이다. 갈수록 격해지는 전쟁을 목도하면서 답답함과 무력감을 완화하려고 진위 확인도 안 된 영상을 퍼 나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신종 하이브리드 전쟁 국면에서 각국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도전 과제를 남긴다. 가짜 정보를 막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팩트도 함께 퍼트려야 한다는 것.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글로벌 파워 지형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아무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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