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닥터최의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연세대학교 명지병원 외래교수
여드름투성이 중3인 막내딸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다.
“왜?”
“엄마 방에 있는 내 필통 좀 갖다 줘.”
“왜 거기가 엄마 방이야? 안방이라고 해야지.”
“엄마 방이야!”
“그럼 내 방은?”
“햄돌 방은 없지.”
아버지의 권위가 완전히 무너진, 막장 집안의 모습인가? 아니면, 가족 구성원의 완전한 평등을 달성한, 미래 지향적인 가족의 모습인가? 어쨌든 우리 집 4인 가족은 서로 큰 불편 없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니, 그럼 된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진료실에서 다양한 인생들과 접하면서, 나 또한 그들로부터 삶에 대해 한 수 배우곤 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는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정말 속된 말로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말리곤 했다. 그런데 그 후 자기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내 생각이 너무 편협했고, 고정관념에서 못 벗어났었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곤 한다.
정신과 의사는 과학자이고, 과학자는 과학적 사고에 따라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과학은 형이상학적 명제(옳고 그름, 아름답고 추함 등)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치료자 역시 인간이고, 인간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도덕과 미학의 입장에서 환자를 평가하고 이끌려고 하게 마련이다. 마치 옆으로 걷는 어미 게가 똑바로 걷는 법을 아기 게에게 가르치는 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도 옆으로 걷고 있다는 것을 치료자가 계속 인지하고 있다면, 더 큰 오류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도움은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겸허하고, 환자와 평등한 입장-같이 옆으로 걷고 있다는 것을 인정-에서 의논하고 조율해 나가는 것이리라.
최영훈 닥터최의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