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부회장의 ‘뉴삼성’ 비전을 위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약 5년 만에 떠난 북미 출장에서 이 부회장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재가동하는 동시에, 바이오와 5G(5세대 이동통신), 인공지능(AI) 등 삼성의 미래 성장사업을 집중적으로 챙겼다.
여기에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1위를 달성하겠다는 삼성전자의 ‘비전 2030’을 가속화할 핵심 기지인 미국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투자 계획도 최종 확정됐다. 대만 TSMC, 인텔 등 경쟁사를 따돌리고 메모리ㆍ시스템 반도체를 통틀어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광폭 행보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는 23일(이하 현지시간) 소식통을 인용해 텍사스주 그레그 애벗 주지사가 이날 오후 5시(한국시간 24일 오전 8시)께 삼성전자의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을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미국 출장 중인 이재용 부회장은 19일(현지시간)에 백악관 고위 관계자들과 만나 테일러시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로 사실상 결정하고 이를 백악관 측에 설명한 바 있다.
투자 계획 확정은 한미정상회담이 열렸던 지난 5월 신규 파운드리 공장 구축에 총 170억 달러(약 20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이후 약 반년 만이다. 미국에 신규 반도체 공장을 짓는 건 1996년 오스틴시에 첫 파운드리 공장 설립 이후 약 25년 만이다. 삼성전자의 역대 해외 반도체 공장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투자다. 삼성전자는 2012년 중국 시안 1공장에 12조 원, 2017년 시안 2공장에 8조 원가량을 투자했다.
애초 신규 공장 부지로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기존 공장이 있는 오스틴시였다. 그러나 올해 초 한파에 따른 정전으로 공장 생산이 중단되는 등 리스크 요인이 불거졌고, 인센티브 협상도 더뎌지며 테일러시가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기존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장이 있는 오스틴과 차로 1시간 거리로 가까워 오스틴 공장과 관련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으면서도, 투자유치를 위한 파격적인 세금 인센티브를 제시한 점이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센티브에 따르면 2026년 1월 31일까지 최소 600만 제곱피트(56만㎡) 규모의 반도체 공장 시설을 건설하고 정규직 일자리 1800개를 제공할 경우, 삼성전자는 처음 10년 동안 낸 재산세의 90%, 이후 10년간 85%를 돌려받을 수 있다.
새 파운드리 공장은 오스틴 파운드리와는 차별화된 첨단 공정 제품을 생산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달 초 진행된 삼성전자 미국 법인과 텍사스주 윌리엄슨 카운티·테일러시 당국과의 합동회의에선 공장 증설 안에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진보한 기술’을 넣을 것이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업계에선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신기술 청사진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을 기반으로 한 3나노미터(nm, nm는 10억 분의 1m) 제품 생산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내년 상반기부터 GAA 기술을 적용한 3나노 제품을, 2025년엔 2나노 제품을 양산한다는 청사진을 공개한 바 있다. 2나노 양산 시점으로 예상된 2025년은 신규 공장 완공 목표 시점과도 맞물린다.
파운드리 1위 회사인 TSMC는 수율과 기술 난도를 이유로 GAA가 아닌 기존 핀펫 구조를 기반으로 한 3나노 양산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즉, GAA 기반 3나노 공정은 삼성전자엔 파운드리 시장에서 점유율을 획기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중대한 변곡점인 셈이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도 "삼성의 최근 행보에선 3나노 등 초미세공정에 대한 자신감이 비친다"라며 "기대만큼 수율, 기술력 등이 받쳐준다면 TSMC와의 격차를 좁힐 잠재력은 충분하다"라고 말했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줄곧 2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30%p 넘게 벌어진 TSMC와의 점유율 격차를 쉽게 좁히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고객사 풀과 오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TSMC를 유의미하게 따라잡으려면, 이를 상쇄할 만한 기술과 서비스가 필수적이다. 삼성전자의 신규 파운드리 공장에 많은 기대감이 쏠린 이유다.
이병훈 포항공대 반도체기술융합센터장(전자·전기공학과 교수)은 "새로운 팹리스가 많이 생겨나는 상황에서, 조금 더 진일보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삼성전자 파운드리 이용을 긍정적으로 고려할 유인이 생기는 것”이라며 “예를 들어 테슬라와 같이 자체 칩 설계를 시도하는 회사들이 많아지면 삼성에도 기회가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미 경쟁사는 글로벌 고객 확대를 위한 기반 다지기에 돌입했다. TSMC는 애리조나 피닉스시에 13조6000억 원 규모의 5나노 파운드리 공장 증설 계획을 일찍이 확정 짓고 6월 착공했다. 인텔 역시 23조 원을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새로운 파운드리 공장 2곳을 신설하고, 4조 원을 투자해 뉴멕시코주 후공장 공장 규모를 키우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황이다.
파운드리 고객을 공격적으로 유치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 부회장의 다른 출장 행보에서도 읽힌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전날 구글 본사를 방문해 순다르 피차이(Sundar Pichai) CEO 등 경영진을 만나 시스템반도체, 가상현실(VR)ㆍ증강현실(AR) 등 차세대 혁신 분야 공조 방안을 논의했다. 앞서 이 부회장은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아마존도 잇따라 방문해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분야와 관련된 전략을 공유한 바 있다.
업계에선 구글 스마트폰 '픽셀 시리즈 6'에 탑재될 것으로 예상되는 자체 설계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생산을 삼성전자에 맡길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이 부회장의 이번 방문을 계기로 양사의 협업 관계가 한층 공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안드로이드 동맹'으로 불리는 구글이 '우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인공지능(AI)과 6G 등 미래 사업을 챙기는 행보도 눈에 띈다. 이 부회장은 21일과 22일 캘리포니아주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반도체와 세트 연구소인 DS미주총괄(DSA·Device Solutions America)과 삼성리서치아메리카(SRA)를 잇따라 방문했다.
DSA와 SRA는 각각 삼성전자 DS부문과 세트(IM, CE)부문의 선행 연구조직으로, 혁신을 선도하고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전진 기지로 일컬어진다.
이 부회장은 DSA와 SRA의 연구원 등과 만난 자리에서 "추격이나 뒤따라오는 기업과의 '격차 벌리기'만으로는 이 거대한 전환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라며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 새로운 삼성을 만들어 가자"고 당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지난 16~17일 매사추세츠주에서 누바 아페얀(Noubar Afeyan) 모더나 공동 설립자 겸 이사회 의장, 버라이즌 한스 베스트베리(Hans Vestberg) 최고경영자(CEO) 등과 회동하며 미국 동서부를 횡단하는 강행군을 이어왔다.
이 부회장의 미국 출장을 계기로 삼성의 변화와 새로운 도약에도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한동안 멈춰 있던 인수ㆍ합병(M&A) 시도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7월 진행된 2분기 실적발표에서 “3년 내 의미 있는 규모의 M&A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라며 5G, AI, 전장사업 등을 후보군으로 제시했다. 이 부회장의 출장길에서도 유망한 M&A 후보군을 중심으로 현장 시찰 등이 이뤄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미국 출장은 이 부회장이 창업의 각오로 '뉴삼성'을 향한 과감한 변화와 도전을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라며 “'메모리 절대 우위, 시스템반도체 글로벌 1위 도약을 위한 기반 마련'을 목표로 세운 이 부회장이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전방위로 뛰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