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발표서 엿보인 주요 기업 고민…"원가·수급·재고 움직임에 촉각"
‘역대 최대’, ‘매출 기록 경신’. 3분기 전자·자동차·조선·철강 등 우리나라 수출을 떠받치는 주요 업종의 대표 기업이 받아든 성적표 내용이다. 그러나 호실적 행진 속에서도 기업들의 안색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세계 경제가 갖가지 외부 변수로 점철된 불확실성 안개로 짙게 둘러싸였기 때문이다.
더욱 우려되는 부분은 불확실성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지만 마땅한 대책을 마련하기 쉽지 않아 간과되는 '회색 코끼리'라는 점이다.
이런 탓인지 최근 진행된 기업들의 3분기 실적 발표에선 4분기, 길게는 내년 경영환경을 둘러싼 깊은 고민이 엿보였다.
기업들은 △반도체 등 부품 부족 △원자재 가격 상승 및 환율 악화 △물류 공급 차질 △위드 코로나 따른 펜트업 수요 둔화 △중국 전력난 등을 경영환경에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중대 변수로 꼽았다. 모두 개별 기업으로선 제어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러한 현상이 복합적이면서도 연쇄적으로 맞물려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더욱 큰 부담이다.
3분기 줄줄이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한 반도체 업계에선 "불확실성이 너무 커 전망조차 제시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달 28일 진행된 삼성전자 실적 발표에서 주요 임원진은 반도체 시황을 언급하며 ‘불확실성’이라는 단어를 10번 넘게 입에 올렸다. 통상적으로 실적과 함께 공개하는 다음 분기 시설투자 규모에 대해서도 말을 아꼈다.
한진만 삼성전자 메모리 전략마케팅실장(부사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부품 수급,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내년 시황에 대한 불확실성이 아주 많다”라며 “이러한 영향으로 고객사의 시황 전망에도 시각차가 나타났고, 가격 협상에 난도가 올라가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특히 최근 하락이 이어지고 있는 D램 가격 향방은 전문가 사이에서도 목소리가 갈린다. 이전보다 사이클 진폭이 작아져 수익성에 과도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과 가격 하락이 예상치를 넘어설 가능성도 있다는 반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가전, 스마트폰 등 전자업계는 부품 부족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비메모리 반도체 공급 부족 상황이 예상보다 오래가며 주력 신제품 출하에 줄줄이 제동이 걸렸다. 삼성전자에선 신형 폴더블 시리즈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 이어졌다. 갤럭시S21 FE(팬에디션) 등 올해 출시가 예정돼 있던 일부 제품은 반도체 부족 여파로 세상 빛을 보지도 못했다.
원자재 수급과 글로벌 물류 이슈도 만만치 않은 문제로 떠올랐다. 삼성ㆍLG전자는 3분기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한 가전 사업 수익성 하락이 시작됐다. 여기에 연말 성수기를 앞둔 시기 물류 공급 차질까지 겹쳐 고민을 한층 더 하고 있다.
LG전자는 3분기 실적발표에서 “물류비 증가가 수익성 악화에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라며 “매출 기준 전년 대비 2% 영향을 미쳤다”라고 밝혔다. 이런 현상이 최소 내년 상반기, 길게는 1~2년 소요될 가능성도 적지 않아 수익성 악화 기조가 당분간 이어지는 건 불가피할 전망이다.
자동차 업계에선 반도체 공급 여부가 4분기는 물론, 중장기적인 실적을 좌우하는 키로 자리 잡았다. 일부 품목의 반도체 공급 부족은 올해 점진적으로 개선되겠지만, 전체적인 정상화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현대차는 반도체 수급 문제 등 불확실한 변수를 고려해 올해 연간 판매 계획을 416만 대에서 400만 대로 낮췄다. 기아도 반도체 부족 사태가 장기화할 우려를 내비쳤다.
주우정 기아 재경본부장(CFO) 부사장은 3분기 실적 발표에서 “(반도체 부족이) 내년 상반기까지는 영향을 미칠 것 같다”라며 “현장에서는 물량을 더 달라고 하고, 본사에서는 물량을 낮추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내년 자동차 산업이 ‘공급의 이슈’ 궤도에 들어섰다는 예측도 내놨다.
자연스럽게 부품 사업도 타격을 받았다. 인포테인먼트와 전기차 파워트레인 등 전장 사업을 영위 중인 LG전자는 "올해 내 전장 흑자전환이 어렵다"고 못을 박았다. 올해 초, '3분기 흑자전환'을 목표로 삼고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온 것과 비교하면 아쉬운 상황이다.
철강·조선업계는 수요 회복으로 주요 기업이 모두 좋은 실적을 거뒀지만, 원자재 가격이 변수로 꼽힌다.
철강업계에서는 최근 들어 철광석 가격이 안정을 찾아가자 이번엔 제철용 원료탄(석탄) 가격이 오르고 있다. 제철용 원료탄 가격은 22일 기준 톤당 400.85달러로 올해 1월보다 4배 가까이 올랐다. 제철용 원료탄은 고로의 철광석을 녹이는 원재료로, 철강재 생산 단가의 20~30%를 차지한다. 겨울철에는 석탄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에 원료탄은 올해 4분기에도 높은 가격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조선업계는 기대 이상의 성적표를 받아들며 숨을 돌렸지만, 핵심 원자재인 후판(두꺼운 강판) 가격은 여전한 변수다. 후판은 선박 건조 비용의 20%가량을 차지한다. 한국조선해양은 후판 가격과 관련해 “원자재 가격 변동이 워낙 크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서 예측하기 어렵다. 협상 시점에서의 상황이 중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외 원자재·에너지 의존도 높은 정유·화학업계는 사업 구조에 따라 극명한 희비가 갈렸다. 정유업계는 확연한 유가 상승 및 정제마진 개선세를 발판으로 4분기에도 실적 반등을 점쳤다.
반면 태양광 사업 등 원가 경쟁력 하락이 불거진 사업을 영위 중인 기업은 당분간 시황 하락이 불가피하다고 짚었다. 3분기 태양광 사업이 적자로 전환한 한화솔루션은 4분기에도 이 같은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며 “올해는 원가, 물류 등이 총체적으로 부담스러운 한 해였다.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시황이 이어졌다”라고 평가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기업의 수익성 악화를 대비한 비상 경영 체제 구축과 원자재 가격 변동 리스크 축소를 위한 원자재 구매의 효율성 확보 노력이 요구된다”라며 “국제유가 급등과 이어지는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해 생산 원가가 증가할 것에 대비해 단계별 비상 계획을 수립하고 각 부서의 실행 능력을 점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