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전략사업 주도권을 확보하고, 인공지능(AI)·5G 이동통신 등 4차 산업혁명 분야의 인수합병(M&A)으로 기술과 시장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반도체와 바이오가 투자의 두 축이다. 반도체는 메모리 초격차로 시장의 절대 우위를 지키고, 파운드리 경쟁력을 집중적으로 키우기로 했다. 복제약과 의약품 위탁개발생산 등 바이오사업도 ‘제2의 반도체’로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 부회장 가석방에 대한 사회적 기대에 삼성이 화답한 것이라고들 한다. 그 부담도 컸겠지만, 반도체를 둘러싼 치열한 글로벌 패권전쟁의 위기를 헤쳐나가려는 다급한 생존전략이다. 이 부회장은 13일 출소 후 서초사옥으로 직행해 경영현안부터 챙겼다. 총수 부재로 오래 미뤄졌던 대규모 투자의 신속하고 과감한 결단이 이번 결과다. 삼성이 “코로나19 이후 앞으로 3년은 새로운 미래질서가 재편되는 시기”라고 강조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 혼돈의 시대에 살아남아야 사회적 책임도 다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해묵은 재벌기업 지배구조 논란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 지배구조에 정답이나 표준은 없다. 좋은 경영실적을 내고 지속성장이 가능한 기업을 만드는 것이 최선이고, 어떤 지배구조를 갖든 기업의 미래를 위한 자율적 판단영역이다. 그러나 진보를 내세운 우리나라 얼치기 반(反)시장주의자들은 소유·경영의 분리와, 전문경영인 체제가 선(善)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끊임없이 오너십의 파괴를 획책해 왔다. 그릇된 착각으로 만들어진 이 정권의 정책은 재벌 지배구조를 흔들고 오너의 리더십을 부정하며 기업을 옭아매는 규제만 쏟아내 온 것이 현실이다.
30년 전 삼성은 미국과 일본 양판점 구석에 먼지가 쌓인 채 처박힌 싸구려 TV를 만들던 3류 기업이었다. 지금 세계 최대 종합전자업체로 올라섰고 메모리반도체 글로벌 1위다. 선대 이병철 회장이 다들 불가능하다며 코웃음쳤던 반도체에 베팅하지 않았고, 이건희 회장이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면서 신경영(新經營)을 선도하지 않았다면 이뤄낼 수 없었던 성취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가장 잘 나가고 있을 때 “10년 후 무엇으로 먹고 살지 생각하면 등에 식은 땀이 흐른다”며 끊임없이 위기경영을 강조하고 혁신의 고삐를 죄었다.
삼성뿐이 아니다. 배 짓는 도크도 없이 우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도안으로 외국 선박을 수주해 오늘날 세계 1위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을 만든 정주영 회장, ‘깡통차’로 조롱받던 현대자동차를 글로벌 5위로 키운 정몽구 회장도 그렇다. 강력한 오너십과 장기 비전을 바탕으로 누구도 가지 못했던 길에 과감하게 도전하고, 신속한 투자결정과 함께 뚝심있게 밀어붙인 힘이 지금의 경이로운 성공을 일궜다. 단기 실적과 성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전문경영인들에게 사업구조를 바꾸는 일이나 모험적인 투자, 대규모 M&A는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키운 재벌이 지금 거세(去勢)되어야 하고, 성공을 일군 오너경영은 타파의 대상이다. 총수가 전횡하는 지배구조와 세습경영을 끊어내야 경제가 공정해진다는 독단과 편견 가득한 이 나라 집권세력에 의해서다. 그들에게 재벌은 가족 소유와 문어발 사업구조,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불공정 거래로 승자독식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양극화의 주범이다. 오너 중심 지배구조 또한 소수 지분으로 경영권을 장악해 전제적(專制的) 경영을 일삼고, 탈법적으로 부(富)를 세습하는 악(惡)의 근원이라고 한다.
재벌들의 과오 물론 작지 않다. 무능한 오너들이 국민 눈높이에 어긋난 변칙과 불공정, 부도덕한 행위로 시장의 지탄을 받아 결국 기업을 망친 경우도 흔하다. 단절해야 할 숙제다. 그렇다고 재벌의 성취와 오너경영의 지배구조까지 싸잡아 부정하는 반기업 규제의 빌미가 될 수는 없다.
척박하고 영세했던 후발 경제의 경쟁력을 키우고 거대 해외기업들과 싸워 이기면서 선진화를 이끌어온 지금 우리 글로벌 기업들이다. 성장의 원동력은 미래에 대한 오너십의 선견(先見)과, 과감하고 집중적이며 지속적인 모험투자를 가능하게 했던 기업가정신의 축적이었다. 어설프고 편향된 이념의 고집밖에 없는 무능한 권력이 그것에 올가미를 씌우고 무너뜨린다. 이런 자해(自害)행위가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