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코노미]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 치열한 이유…’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와 빌바오 효과

입력 2021-06-03 17:11수정 2021-06-0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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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코노미는 넷플릭스와 왓챠 등 OTT(Over The Top) 서비스에 있는 콘텐츠를 통해 경제와 사회를 바라봅니다. 영화, 드라마, TV 쇼 등 여러 장르의 트렌디한 콘텐츠를 보며 어려운 경제를 재미있게 풀어내겠습니다.

요즘 지자체들 사이에서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이 뜨겁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경남, 과천, 여수 등 안 뛰어든 도시가 없을 정도다. 심지어 대구시는 건축비 2500억 원을 전부 부담하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지자체들의 경쟁이 이토록 뜨거운 건 미술관이 들어선 이후 '빌바오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1997년 쇠락해 가던 스페인 북부 공업 도시 빌바오는 미술관을 유치하면서 성공적인 관광 도시로 탈바꿈했다. 인구 40만 명도 안되는 작은 도시에 매년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왔고, 실업률이 30%에 육박했던 빌바오는 활기를 되찾았다.

빌바오를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도시 재생 사례로 만든 건 20세기 현대 미술계를 이끈 구겐하임 가문의 미술관이다.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Peggy Guggenheim: Art Addict, 2015)'는 구겐하임 가문이 낳은 전설적인 아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다.

▲페기 구겐하임은 어린 시절부터 구겐하임 가문의 악동으로 불렸다. 학창시절 한 때 눈썹을 다 밀어버린 적도 있었다. (네이버 영화)

페기는 구겐하임 가문의 악동이었다. 틀에 박힌 명문가 규수의 삶을 거부했다. 21살, 서점에서 일하며 문학과 아방가르드 예술을 접한 페기는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다. 이런 자유로운 성향에는 그의 어린 시절 결핍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다큐에 따르면 페기 가족은 왕족처럼 살았다. 친가는 유대인 광산 부호였고, 외가는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재산은 넘쳤으나 마음은 늘 빈곤했다. 페기의 어머니는 기이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모와 외삼촌들도 모두 나사 하나 빠진 듯했다.

아버지는 늘 밖으로 나돌았다. 페기가 7살 때 "밤마다 외출하는 걸 보니 아버지한테 애인이 있나 봐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페기에게 큰 사랑을 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페기가 13살 때 아버지는 타이타닉 호에 승선했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 벤 구겐하임은 자신이 입던 구명조끼를 다른 사람에게 줬다. 아버지의 부재는 페기의 어린 시절 결핍에 영향을 미쳤다.

▲페기는 자신과 같은 상속자를 만나 결혼하는 판에 박힌 삶을 뒤로하고, 21살 인생의 의미를 찾아나선 길 잃은 소녀 같은 기분으로 파리로 향한다. (네이버 영화)

당시 파리는 문화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도시였다. 회화뿐 아니라 음악, 연극, 영화 등 모든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20대 초반 페기는 파리에서 마르셀 뒤샹, 만 레이 등 전설적인 현대 예술가와 만나 지식과 안목을 키웠다.

23살, 페기는 다다이즘 예술가 로렌스 베일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은 가정폭력을 일삼았고, 결혼생활은 7년 만에 끝이 났다. 이후 페기는 존 홈스라는 예술 비평가를 만났지만, 존은 만난 지 5년째 되던 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연이은 시련은 페기로 하여금 더욱 예술에 집중하게 했다.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페기는 '구겐하임 젠느'라는 첫 번째 화랑을 열었다. 하지만 경영난으로 화랑은 1년 6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페기는 대신 더 큰 돈을 들여 갤러리를 짓기로 한다. 마르셀 뒤샹의 도움을 받아 개관 전시회까지 준비했지만, 갤러리는 끝내 문을 열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미국으로 망명하던 시기, 오히려 페기는 파리로 향해 초현실주의 작품을 사들인다. (네이버 영화)

전쟁으로 모두가 그림을 팔 때, 페기는 그림을 샀다. 나치는 모더니즘을 박해했고, 페기는 유대인이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쟁은 페기에게 좋은 그림을 살 수 있는 바겐 세일 기간이었다. 그는 단돈 4만 달러에 피카소, 브라크, 자코모 발라, 살바도르 달리 등 굵직한 현대 미술 작품을 사들였다. 페기 역시 타고난 금전 감각을 가진 구겐하임 가문의 사람이었다.

페기는 작품만 긁어모으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와중 예술가의 망명을 도왔고, 미국에 와서는 세계 미술의 중심지를 파리에서 미국 뉴욕으로 변화시켰다. 1941년 페기가 뉴욕으로 돌아와 문을 연 '금세기 갤러리'를 빼놓고는 현대 미술사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페기는 새로운 예술가 발굴에도 힘썼다. 그가 연 '여성 작가 31인 기획전'을 통해 프리다 칼로의 미국 진출 발판을 마련했으며, 페기의 지원으로 추상화가 잭슨 폴락이 세계적인 화가로 발돋움했다. 구겐하임 재단을 세운 그의 삼촌 솔로몬 R. 구겐하임이 막대한 재력을 앞세운 컬렉터라면, 페기는 탁월한 안목과 감각, 열정으로 예술가들을 지원한 컬렉터였다.

▲페기는 생전 "나는 미술 컬렉터가 아니라 미술관이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20세기 현대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영화)

구겐하임 미술관은 현재 뉴욕과 빌바오, 베네치아, 베를린, 아부다비에서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베네치아 미술관은 1979년 페기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문을 열었다. 베네치아는 생전 페기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이다.

페기의 컬렉션이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페기 스스로 "박물관"이라 칭했을 정도로 그의 컬렉션이 대단할 뿐 아니라, 세상과 집안의 손가락질에도 예술에 온 삶을 바쳤던 그의 열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페기는 예술을 돈벌이로 생각하지 않았다. 생전에 그는 점차 상업적으로 변해가는 미술계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페기를 떠나보낸 사람들 역시 주판알 굴리듯 페기의 컬렉션을 대하지 않았다. 고인의 뜻대로 베네치아에 박물관을 열었을 뿐이다. 한국형 빌바오 효과를 노린다는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 한번 곱씹어 볼 만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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