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지천명 아파트]②창고로 전락한 '한때 최고급 주상복합' 동대문상가

입력 2021-05-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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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축 규제 완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건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 이후 노후 아파트 시장이 뜨거워지고 있다. 오 시장 공약대로 재건축으로 주거 환경 개선과 자산 가치 향상을 노릴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하지만 그 시장에서도 소외받는 아파트가 있다. 토지 문제, 사업성 부족, 소유주 이견 등으로 재건축이 막힌 아파트다. 이투데이는 사람 나이로 지천명(知天命), 즉 준공 후 50년을 넘기고도 재건축 난항에 빠진 아파트를 찾아갔다.
<글 싣는 순서>
① '땅 없는 설움' 중산시범 "동별로 땅 사게 해달라"
② 창고로 전락한 '한때 최고급 주상복합' 동대문상가아파트
③ 재건축 막힌 덕에 직장인 전세 성지된 서소문아파트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대문신발도매상가-동대문상가아파트 전경. 심민규 기자. wildboar@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에 ‘동대문상가아파트’가 서 있다. 무허가 판자촌이 난립하던 청계천 변을 민간이 매립해 지은 동대문 일대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다. 1968년 9월 완공됐을 때만 해도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란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지상 5층 높이로 네 개 동이 들어서 1~3층엔 상가가, 4~5층엔 주거시설이 들어섰다.

53년이 지난 지금 동대문상가아파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동대문 신발 종합상가’란 간판 일부는 이미 무너져 내렸고 천장과 기둥 벽지와 타일도 떨어져 나갔다. 건물 배관과 전깃줄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50년 넘게 시설 보강 등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속에서 주민 안전은 위협받고 있다.

최고급 주상복합서 C등급 관리대상으로

지난 17일 동대문상가 아파트 A동에 들어서자 바닥에 널브러진 박스와 쓰레기봉투가 먼저 눈에 띄었다. 계단과 복도마다 상자와 쓰레기가 길을 막고 있었다.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정도였다. 화재가 발생하면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날도 입주민들이 무리를 이뤄 복도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들 뒤엔 ‘금연구역’이란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에만 동대문상가아파트에서는 수차례 화재가 발생했다. 2014년도엔 B동에서 화재가 발생해 3~4층 신발창고와 사무실을 태웠고 올해도 A동 건물 2층 창고에서 불이 났다.

이 아파트 5층에서 만난 주민 최 모(51) 씨는 “화재가 발생하면 소방청에서 안전 현장점검에 나서는데 그때만 잠깐 상인들이 박스를 치우지, 시간 지나면 다시 원상 복귀돼 길을 막기 일쑤다”라고 말했다.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동대문상가아파트 천장과 뒤틀린 창틀. 심민규 기자. wildboar@

동대문상가아파트 안전 문제는 때마다 공론화되는 문제지만 지금껏 눈에 띄는 조치는 없다. 2017년 서울시의회에서도 철근 부식과 외벽 균열 등 아파트 안전 문제가 제기됐다. 종로구에선 이 아파트를 특정 관리 대상 시설물(재난 발생 위험성이 높거나 재난 예방을 위해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시설물) C등급으로 지정했지만 매년 두 차례 점검만 나올 뿐 제대로 된 보수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리모델링 구상은 검토 단계에서 멈춰 있다.

안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주민들은 동대문상가아파트를 떠나고 있다. 애초 이 아파트를 세울 때 주거시설로 지었던 4층 대부분은 신발 재고창고로 사용되고 있었다. 취재를 도운 공인중개사 최 씨는 “동마다 120가구가 들어서 있는데 주로 5층만 주거 목적으로 이용하고 4층은 창고와 주거용이 섞여 있다”며 “신고하는 사람도 없고 불법 용도변경으로 암묵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했다. 4층이 창고가 되면서 복도 통로는 더욱 좁아졌다.

상인 반대에 국유지 매수 지지부진...“정부-민간 노후 아파트 문제 협동해야”

종로구 도시개발과 관계자는 “현재 동대문상가아파트가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아 주거 환경 개선이 힘들다”고 말했다

지금으로선 재건축 정비구역 지정은 언감생심이다. 첫 번째 난관은 땅 문제다. 동대문상가아파트 건물은 민간이, 부지는 국가가 갖고 있어서다. 국유지 위에서 민간이 재건축을 하려면 매수 요청을 통해 땅을 넘겨받아야 한다. 토지 문제에서 자유로운 민간아파트와 비교해 관문이 하나 더 있는 셈이다.

더 큰 난관은 동대문상가아파트 아래에 있는 상가 상인이다. 상가 상인 가운데선 상가 리모델링이나 재건축에 소극적인 분위기가 짙다. 리모델링이나 재건축을 추진하면 공사가 끝날 때까지 가게를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상가 세입자는 생계 유지 문제에 더 민감하다. 동대문상가아파트 C동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조 모(38) 씨는 “굳이 장사가 멀쩡히 되고 있고 임차로 가게 운영하는데 누가 동의하냐”고 말했다. 상가 주인ㆍ입주민 호응을 얻지 못하면 재건축 추진위조차 출범하기 어렵다.

▲동대문상가아파트 복도 모습. 심민규 기자. wildboar@

재건축도 주거환경개선사업도 진행되지 않는 상황은 주민들의 안전 문제를 키울 공산이 크다. 전문가들은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챙기기 위해 노후 아파트 문제에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서울 서대문구 좌원상가가 공공 주도로 재건축을 추진하는 선례도 있다. 한국 첫 주상복합아파트인 좌원상가도 상가 세입자 생계 문제와 영세민 이주 대책으로 오랫동안 방치돼 있었다. 지난해 국토교통부는 도시재생 뉴딜사업 일환으로 좌원상가를 고층 주상복합아파트로 재건축하기로 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부 교수는 “동대문상가아파트와 같은 노후 아파트 안전 문제에 있어선 국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며 “국가가 나서서 안전 진단을 하고 (안전) 취약 지역에는 거주하지 못하게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도 “동대문상가아파트의 경우 서대문구 좌원상가와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에 정부와 민간이 협동해 노후 아파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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