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프리즘] 한국의 오너, 외로움과 무한책임

입력 2021-05-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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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전 에스케이 사장

“저는 사표 낼 데가 없어요.” 계열사의 어느 대표가 사표를 제출했다고 보고했더니 오너인 회장이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회사에 큰 손실을 끼치고도 떠나면 그만인 사장에 비해 남은 빚과 직원을 모두 떠안아야 하는 회장의 고뇌가 읽혀졌다. 그 순간만큼은 회장이 외롭게 보였다. 무한책임의 무게를 멍에처럼 이고 살아야 하는 오너십의 실체를 느낀 순간이었다.

남양유업의 오너인 홍원식 회장이 지난 4일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자식에게도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울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경영권이 무엇인가? 홍 회장은 남양유업의 지분 51.68%를 가지고 있는 명실상부한 오너이자 단일 최대주주다. 경영권의 원천인 지분은 그냥 가지고 경영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음 주주총회에서는 모든 사안에 기권만 할 셈인가? 거기다 자식에게 상속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성인이 된 자식의 권리는 자식 스스로가 포기해야 마땅하다.

주주들은 총회에서 구성된 이사회에 경영을 위임한다. 그런데 사내이사 4명과 사외이사 2명으로 구성된 남양유업 이사회를 보면 홍 회장, 홍 회장의 모친, 홍 회장의 아들, 그리고 이미 사의를 밝힌 전문경영인이 사내이사로 등재되어 있다. 전형적인 가족기업의 모습이다. 홍 회장의 사퇴에도 홍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는 등기이사직을 유지하고 있다. 경영권 분쟁이 일어났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홍 회장이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홍 회장의 사퇴는 오로지 위기를 모면하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함이 아닌지 의심된다. 무한책임이라는 오너십의 진정한 실체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차라리 그가 오너십을 걸어 놓고 가족경영을 해체하겠다, 새로운 기업문화를 정립하겠다 이런 발표를 했으면 어땠을까. 오너십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위기를 극복하고 모든 책임을 떠안는 자세를 보였더라면 시장은 오히려 박수로 화답했을 수도 있다.

오너의 사퇴는 고도의 경영 행위다. 예상되는 경영공백을 최소화하고 이를 신속히 메우는 것도 오너의 책임이다. 잘될 때도 못될 때도 오너는 책임이 크다. 같은 날 금호석유화학의 박찬구 회장이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회사는 오너 체제에서 이사회 중심의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한다고 했다. 박 회장은 곧바로 등기이사직을 사퇴했고 회사는 새로운 대표를 선임했다. 구체적 행동이 동반되면서 예상되는 경영권 공백의 우려는 사라졌다. 이 회사는 가족 간에 경영권 분쟁이 있었다. 그러나 사상 최대의 실적을 바탕으로 박 회장은 지난 3월 주총에서 경영권을 지켜냈다. 호실적에 주주들의 신임, 그는 장수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했다. 그런데 박 회장은 최고의 순간에서 극적인 선택을 했다. 좋다고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물러나겠다고 했다. 시장은 박수를 쳤다. 행여 여건이 바뀌어 그가 다시 복귀하더라도 명분은 확보 된 셈이다. 외로운 오너십의 유일한 동반자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회장의 사퇴가 번복된 사례는 많다. 최근에는 이건희 회장이 그랬다. 이 회장은 2008년 사퇴했다가 2년 후 복귀했다. 사퇴할 때에도 복귀할 때에도 시장이 명분을 만들어줬다. 그의 회장직 사퇴와 함께 회사는 비자금 사건이라는 먹구름이 걷혔다. 위기가 해소된 것이다. 이 회장이 복귀하자 경제개혁연대는 삼성의 위기가 더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보란 듯이 위기를 극복했다. 그는 재임 중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을 1200배 키웠다. 그 기간 동안 우리 경제는 대략 10배 가량 커졌다. 사퇴의 명분도 복귀의 명분도 위기였고 그는 시장에서 이 명분을 실천했다. 외로운 오너십에 시장이 따라오자 회사는 좋아졌고 사회는 박수 쳤다.

위기 대응 과정에서 남양유업의 홍 회장은 철저히 자신을 숨겼다. 대리점 갑질 때에도, 경쟁사 비방 때에도 책임 있는 오너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자 시장이 돌아섰다. 100만 원이 넘는 황제주였던 남양유업의 주가는 30만 원대로 떨어졌고 회사는 적자로 전락했다. 경쟁사와의 매출 순위는 역전됐다. 책임은 직원들에게 전가하고 피해는 회사에 떠넘기는 사이에 위기는 끊임없이 반복됐다.

반면 금호석유화학이나 삼성은 위기에 임하는 오너들의 대응이 달랐다. 경영권 분쟁을 겪고도, 사법처리의 리스크가 있었어도 회사는 최고의 실적을 구가했다. 오너십이 발휘한 무한책임의 자세에 시장이 친구처럼 따라와 화답해준 덕분이다. 시장이 외면한 오너십은 추락했고 시장이 따라준 오너십은 빛났다.

오너는 외롭다. 무한책임의 멍에까지 짊어지고 숙명처럼 경영을 한다. 위기는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대응 과정에서 옥석이 가려진다. 지구상 그 어느 나라보다 많은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한국의 오너들, 이들에게 5월의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기를 바란다. 울먹이는 오너의 모습이 사라지면 우리 경제의 먹구름도 걷히리라. 사장의 사표는 회사가 처리하겠지만 오너가 사표를 낼 곳은 결국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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