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수호천사' 주장, 건설사는 '저승사자'로 인식
"신문이나 방송에 나온 내용과 별로 다를 바 없네요. 현재로선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은행권이 18일 건설사들의 '대주단 협약' 가입을 적극 독려하기 위해 대대적인 설명회를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건설업체들의 '대주단 기피 현상'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 은행연합회를 중심으로 은행권이 몇 차례 보도자료를 내고 설명회를 개최했지만 건설사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주최 측은 건설사에 대한 유동성 지원 취지와 익명성 보장, 경영불간섭 등을 누누이 강조했건만 참석자들의 불신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유동성 지원이 시급한 건설업계가 대주단 가입을 기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호천사 아닌 저승사자
은행권은 당초 대주단을 구성한 취지가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건설사들을 돕기 위한 것임을 수없이 강조해왔다. 일각의 우려처럼 '저승사자'가 아닌 '수호천사'라는 것이다.
은행연합회는 이날 오후 설명회에서 "대주단 협약은 일시적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정상적인 기업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며 "살생(殺生)부가 아니라 상생(相生)부"라고 강조했다.
앞서 유지창 은행연합회장도 간담회를 열고 "대주단은 올 초 은행장 모임에서 신상훈 신한은행장이 어려운 건설업체들을 금융권이 함께 나서 도울 방안을 찾아보자고 제안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면서 "은행들이 어려운 기업에 대해 서로 돈을 빼버리는 '치킨 게임'을 하지 말자는 뜻에서 만든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수호천사가 언제 저승사자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게 건설업계의 인식이다. 이른바 '꺾기'와 갑작스런 상환 요구 등 채권자의 우월적 지위에서 나오는 각종 불합리함을 한번이라도 경험해 본 기업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견건설업체 A사 관계자는 "(은행권이)대주단 가입을 꺼리고 있는 많은 건설사들의 고민이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가입을 해도 불이익이 없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먼저 심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그동안 은행과의 거래를 통해 체득한 뼈 속 깊은 '불신'이 대주단 가입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익명성 과연 보장될까
건설업계가 크게 우려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익명성 보장'이다.
이날 은행권이 설명회를 통해 직접 설득에 나선 것도 '대주단에 가입할 경우 오히려 유동성 위기를 자인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바꿔보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대주단에 가입할 경우 금융권의 평판이 오히려 나빠질 것이라는 추측은 기우"라며 "혹 대주단 가입을 신청했다가 탈락한 업체들도 피해를 입지 않도록 익명성을 철저하게 보장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은행 측의 '익명성 보장' 약속을 신뢰하는 건설업체는 거의 없다. 설령 은행권이 익명성 보장에 심혈을 기울인다 해도 언제 어떻게 알려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최근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B사 관계자는 "만약 대주단 가입 사실이 알려질 경우 '부실기업'이라는 꼬리표가 계속 붙어 다닐 것"이라며 "현재로서는 마음 편히 대주단에 가입할 수 있는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이어 "대주단이 '익명성 보장에 책임을 진다'는 각서를 쓰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야 말로만 하는 익명성 보장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경영권 침해는 없다(?)
경영권 침해 우려도 건설사들이 대주단 가입을 꺼리는 심각한 이유다. 말로는 '경영권을 보장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를 보장 받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
은행권은 일단 대주단 협약은 '워크아웃'처럼 양해각서(MOU) 체결이나 자산매각 등의 요구사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입장이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일각에서는 경영권 침해를 우려하기도 하는데 이는 논리상 맞지 않는 것"이라며 "은행에 따라 자구계획을 요구하는 곳도 있지만 사업계획을 확인하는 차원이지 심사하자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C건설사 관계자는 "말로는 경영권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결국 '자구책을 내놔라' '서류를 내라' 하면서 경영권을 침해할 것"이라며 "대주단 가입 전에 구체적으로 경영권 통제의 상한선을 명확히 해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대주단 가입을 놓고 은행권과 건설업계의 인식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하지만 최근 부도를 맞은 신성건설의 교훈을 통해 확인했듯 건설업계의 유동성 문제 해소는 하루가 시급한 현안이다.
따라서 은행권이 어떤 방법으로 오해와 불신을 극복하고 건설업계의 수호천사가 될 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