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겪은 일이 삶의 궤적을 바꿔놓기도 한다. 재미 삼아 던진 공이 한 소년을 야구선수로 이끌기도, 호기심에 나간 게임대회를 시작으로 프로게이머의 길을 걷기도 한다. 우연히 간 카페에서 자신의 인연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애니 덕후’ 김건우(24) 씨가 그렇다. 고등학교 졸업여행으로 떠난 도쿄. 우연히 간 ‘아키하바라’에서 새로운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연기가 하고 싶어 한 대학교 연극영화과에 합격했지만, 그날 부로 다른 길을 걷게되었다는 김 씨.
그는 “옛날에 전자산업이 성행한 ‘아키하바라’가 지금은 덕후들의 성지에요. 여기가 주는 느낌이 새롭더라고요. 몇 년 동안 연극영화과에 가려고 준비했고, 합격까지 했는데 등록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일본 문화를 공부하는 게 ‘내 길’이라고 확신했거든요. 그 뒤에 반수해서 일어일문학과에 들어갔어요.”
갑작스레 바꾼 진로지만, 부모님은 그를 믿었다고 한다. 평소 할 것은 다 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그를 응원했다. 되레 친구들이 연기를 포기한 게 아깝지 않으냐고 물었다고 한다.
“저는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일본에 갔을 때, 이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스무 살 때 자기가 좋아한 걸 찾기 어려울 수 있는데 일생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하는 취미이자 일을 찾은 것 같아요.”
일본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애니메이션이다. 김 씨가 애니메이션 덕후로 입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만화책과 피겨를 수집했다.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책과 피겨를 샀다. 관심을 가진 애니메이션 종류만 30종이 넘는다.
“지금까지 2000만 원 정도 쓴 것 같아요. 피겨가 100개쯤 되고, 만화책도 400권 정도 돼요. 피겨는 싼 것이 2만~3만 원 수준이고, 비싼 것은 10만 원도 넘어요. 주문 제작하면 100만 원 정도? ‘덕질’을 위해 (일본어 과외 등) 일을 쉰 적이 없어요.” (웃음)
애니메이션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김 씨가 별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그와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애니 덕후'들이 모이는 ‘코믹월드’ 행사는 열릴 때마다 1000명 이상이 모인다. 한 두달에 한 번 꼴로 열리는 이 행사의 참가비는 5000~6000원 선. 코스프레 한 사람을 구경하고, 관련 상품도 구매한다. 벌써 10년이나 열렸다.
“코믹월드 열기 외에도 피겨를 파는 가게가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관련 산업도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아요. 2014년만 해도 애니메이션 피겨 가게를 한 손에 꼽을 정도였어요. 주로 남부터미널역에 있는 국제전자센터에서만 거래를 했죠. 지금은 포털에 등록된 곳만 36군데에요. 몇 년 사이에 매장도 많이 생기고, 종류도 많아졌죠."
‘애니 덕질’의 양상도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피겨나 코스프레로 덕질을 했지만, 최근에는 모바일 게임 비중이 높아졌단다. 원작은 모바일 게임인데, 줄거리가 애니메이션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어 게임에서 애니메이션을 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덕후들 사이에서는 ‘프린세스 커넥트’가 유명해요. 게임에 돈 쓰는 것을 ‘현질’한다고 하잖아요. 여기서도 돈을 많이 써요. 저도 400만 원 정도 현질을 했어요. 요즘에는 애니 덕후들이 덕질할 수 있는 통로가 많아진 것 같아요. 모바일 게임에 수백만 원 쓰는 사람이 수두룩하더라고요.”
프린세스 커넥트는 덕후들의 관심에 힘입어 소위 '히트친 게임'의 반열에 등극했다. 누적 다운로드 건수 330만 건, 애플 앱스토어 최고 매출 순위 2위, 구글 플레이 3위에 올랐다. 이 게임을 배급한 카카오게임즈 관계자는 "3~4주에 한 번씩 이뤄지는 업데이트 때마다 매출 순위 10위권에 들어간다"라고 귀띔했다.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상품과 서비스에 돈을 쓰는 애니 덕후들. 관련 산업의 규모 성장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여전히 욕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단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덕후'라는 이유로 욕을 먹었다는 김 씨다.
"예전보다는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비판적인 시선이 있는 것 같아요. 인식이 바뀌어야 하는데 한 사람의 힘으로는 힘들어요. 많은 사람이 함께 노력하고 유쾌하게 반응하면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덕후들은 누구보다 좋아하는 게 뚜렷한 사람들이니까요." 그가 인터뷰에 기꺼이 응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