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주말은 농장에서 보내고 월요일 이른 아침이면 조치원역에서 서울행 무궁화 열차를 탄다. 이 시간 즈음이면 상행선과 하행선 모두 통근 통학 열차일 텐데, 아주 가끔 따스한 풍경과 마주칠 때가 있다. 조치원역에서 대전 방향으로 출발하던 기차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는데, 웬일인가 하고 보면 교복 입고 책가방 멘 녀석들이 후다닥 3번 선로를 향해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들어온다. 마음 넉넉한 역무원이 녀석들을 보고 이미 출발신호를 보낸 기차를 급하게 멈춰 세운 모양이다. 녀석들이 이 기차를 놓치면 지각할 테니 배려해주는 것이리라. 이런 장면을 마주할 때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번진다. 아직은 살 만한 사회로구나 싶어지면서.
나는 무궁화 열차의 은근한 팬(?)이다. 사랑을 비교급으로 표현하는 건 금물일 테지만, KTX 일반실보다 자리도 널찍하고, 여름엔 냉방, 겨울엔 난방도 KTX 부럽지 않을 만큼 수준급이다. 한데 무궁화 열차를 사랑하는 진짜 이유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감에 있다. 사람들은 KTX의 속도감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지만, 나는 굳이 선택하라고 하면 무궁화 기차표를 발권할 때가 더 많다.
KTX는 너무 빨리 달려 차창 밖 풍경을 도무지 감상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하기야 서울~천안 사이는 전원 풍경이 거의 사라졌으니 크게 아쉬울 것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그래도 기차를 탔으면 창 밖 풍경을 구경하는 재미에 슬그머니 잠을 청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 KTX 도입 당시엔 서울~대전이 1시간도 채 안 걸리는 바람에 대전역을 지나쳐 동대구역에서 내리는 승객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동대구역에서 다시 대전까지 4인 1조로 운영되던 택시 서비스까지 있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기억이 난다. 확실히 KTX를 타면 행여 기차역을 지나칠까 봐 노심초사하게 되니 다소 촌스럽긴 한 것 같다.
무궁화 열차 안에서는 이곳저곳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들이 들려오곤 한다. 구수한 사투리까지 얹어서 말이다. 대체로는 상행선보다 하행선 기차 안이 여유로운데, “며느리가 삶은 계란과 김밥을 싸주었어”라며 “함께 먹자”는 인정 많은 어르신을 만날 때도 있고, ‘어디까지 가시느냐, 뭔 일로 가시느냐, 자녀들은 여위었느냐(혼인시켰느냐)’ 살갑게 물어오는 할머님을 만날 때도 있다. 환갑 나이에 “아이고, 새댁같이 곱네(?!)”라는 과찬도 들어봤다.
무궁화 열차에 단점이 있다면, KTX를 먼저 보내느라 연착(延着)과 연발(延發)이 빈번하다는 점일 것이다. 중간중간 선로 부족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라는데, 왜 늘상 무궁화 열차만 양보해야 하나 은근 심술이 나기도 한다. 그래도 너나없이 빨리빨리를 외치는 세상에 ‘느리게 가도 괜찮다’ 가르쳐 주기도 하고, 누구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세상에 ‘먼저 가시라’ 솔선수범도 하니, 무궁화 열차의 미덕을 높이 사줘야 할 것 같다.
바람이 있다면 무궁화 열차만큼은 통일호 열차처럼 사라지지 않았음 좋겠다. 들리는 이야기론 무궁화 열차 운영으로 인한 적자가 누적되고 있어 요금을 올리든 운행을 중단하든 선택 기로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무궁화 열차의 진정한 가치만큼은 돈이나 이윤 같은 잣대로 재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내일도 사람 냄새 여전하고, 가끔은 따스한 인정이 오가기도 하는 무궁화 열차를 타러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