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올해 국내 제약사들의 기술수출 규모는 29억 달러(약 3조2400억 원)에 달한다. 유한양행이 터뜨린 1조4000억 원 잭팟이 전체 규모를 대폭 키우는 데 일조했지만, 연초부터 꾸준한 기술수출 소식이 쌓이면서 이 같은 성과를 일궈낸 것으로 보인다.
유한양행은 비소세포폐암 치료를 위한 임상 단계 신약 ‘레이저티닙’을 12억5500만 달러 규모로 얀센에 수출했다. 반환 의무가 없는 계약금만 500억 원이 넘는 초대형 계약이다. 상업화하면 매출 규모에 따라 10% 이상의 경상기술료(로열티)도 받는다.
레이저티닙은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표적 비소세포폐암 치료제다. EGFR-TK 변이성 비소세포폐암에 대한 1차 치료제 개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임상 1/2상 시험을 진행 중이며, 얀센은 내년 글로벌 임상 3상에 돌입할 예정이다.
현재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시장은 글로벌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가 독점하고 있다. 타그리소는 지난해 9억5550만 달러(1조74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레이저티닙은 최근 공개된 임상 2상 중간 결과에서 타그리소 대비 우수한 항암 효과와 내약성을 나타냈다.
기술수출 규모가 커진 것뿐만 아니라 영역도 다양해졌다. 중외제약은 덴마크 제약사 레오파마에 혁신적인 아토피 피부염 치료제 ‘JW1601’을 전 임상 단계에 기술수출했다. 계약 규모는 총 4억200만 달러(약 4500억 원)에 이른다.
JW1601은 히스타민 H4 수용체에 선택적으로 작용해 아토피 피부염을 유발하는 면역세포의 활성과 이동을 차단하고, 가려움증을 일으키는 히스타민의 신호전달을 억제하는 이중 작용기전을 갖고 있다. 항염증 효과 위주인 경쟁 개발 제품과 달리 아토피 피부염으로 인한 가려움증과 염증을 동시에 억제한다. 특히 기존 연고 형태나 주사제와 달리 경구제(알약)로 개발하고 있어 환자의 복용 편의성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신약후보 물질로 평가된다.
JW중외제약은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JW1601의 임상 1상 시험계획(IND)을 승인받고 2019년까지 임상 1상을 진행한다. 레오파마는 2020년부터 글로벌 임상 2상에 들어간다. 현재 5조 원 규모인 전 세계 아토피 치료제 시장은 2024년 8조 원 이상으로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동아에스티는 올해 1월 미국 뉴로보 파마슈티컬스와 당뇨병성 신경병증 치료제 ‘DA-9801’의 기술수출 계약을 맺었다. 계약금 200만 달러와 뉴로보 지분 5%를 받았으며, 계약금과 마일스톤을 합한 총금액은 1억8000만 달러(약 1900억 원)이다.
DA-9801은 진통 효과와 신경재생 효과가 있는 천연물 의약품이다. 미국에서 임상 2상을 성공적으로 완료해 현재 임상 3상을 앞두고 있다. 당뇨병성 신경병증은 고혈당 탓에 신경세포가 죽거나 변성되는 질병으로 손끝이나 발끝 등 길이가 긴 신경이 분포하는 곳에 주로 나타난다.
SK케미칼은 자체 개발한 ‘세포배양 방식의 백신 생산 기술’을 사노피 파스퇴르가 개발하는 범용 독감백신에 적용하는 라이선스 계약을 2월 체결했다. 사노피 파스퇴르는 20여 종의 감염성 질환을 예방하는 백신을 개발해 매년 전 세계 5억 명 이상의 인구에게 공급하는 글로벌 백신 기업이다. 계약 규모는 1억5500만 달러(약 1700억 원)로 국내 기업의 백신 기술수출로는 사상 최대 금액이다.
세포배양 독감백신 생산 기술은 종전 유정란 방식보다 빨리 만들 수 있고 효율이 우수하다. SK케미칼은 이를 활용해 2015년 3가 독감백신을, 2016년 세계 최초로 4가 세포배양 독감백신을 상용화했다.
바이오 기업들도 연달아 기술수출 낭보를 전했다. 크리스탈지노믹스는 표적 급성골수성백혈병 신약후보 물질 ‘CG026806’을 미국 나스닥 상장사 앱토즈 바이오사이언스에 기술수출했다. CG026806은 미국 임상 1상을 위해 임상시험계획(IND) 제출을 준비하고 있다.
ABL바이오는 7월 TRIGR 테라퓨틱스에 항암제 후보 물질 5개를 총 5억5000만 달러(약 6200억 원)에 기술수출했다. 이 가운데 임상 속도가 가장 빠른 ‘ABL001’은 대장암, 난소암 등을 공격하는 항체와 혈관 생성에 도움을 주는 항체로 구성됐다. 글로벌 제약사 로슈의 치료제 ‘아바스틴’에 면역 치료 효과를 더한 것으로, 임상 1상에서 효과를 확인했다.
기술수출은 개발 중인 파이프라인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이벤트다. 연간 매출액 1조 원을 넘기는 기업을 찾기 힘든 국내 제약업계의 현실에서 기술수출은 R&D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위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으로 꼽힌다. 업계 관계자는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이어진 R&D 투자가 빛을 보기 시작했다”며 “주요 제약·바이오기업들의 R&D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내년에도 성과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