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5년간 리더 양성 시스템 뒤엎어…차기 리더 후보들 잇따라 축출
21일(현지시간) 크르자니크는 직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실이 밝혀져 사임했다. 인텔은 관리자급 이상이 사내 연애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최근 자체 조사에서 크르자니크가 과거 이를 위반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2011년 제정된 이 규정은 연공서열에 상관없이 모든 관리자에 적용된다.
현재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재임 중인 로버트 스완이 공석이 된 CEO 자리를 임시로 메우기로 했다. 다만 스완은 CEO 자리에 오래 머무르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블룸버그통신은 크르자니크가 갑자기 사임하면서 세계 2위 반도체업체 인텔의 사상 최악 리더십 위기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가장 큰 문제는 크르자니크가 인텔 CEO로 있는 5년간 사내 경영진을 육성하기 위한 멘토 시스템을 파괴하고 차기 리더로 꼽히는 후보들을 축출해왔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내부 후임자 선택지가 좁아진 인텔은 회사를 떠났거나 축출돼서 나간 인사들로까지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근 몇 년 동안 인텔은 임원 유출을 계속 겪었다. 지난해 인텔 데이터센터 책임자였던 다이앤 브라이언트와 30년간 회사와 함께 했던 스테이시 스미스 전 CFO가 회사를 떠났다. 차기 CEO로 점쳐지던 커크 스카우겐도 2016년 회사를 떠나 레노버그룹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5년에는 르네 제임스 전 사장이 돌연 사임하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그나마 가능성이 점쳐지는 인물로 회사를 오래 지킨 나빈 쉬노이와 외부에서 영입된 벤카타 렌두친탈라 두 명이 꼽힌다.
쉬노이는 현 인텔 임원진 중에 유일하게 사내 육성 프로그램을 거쳐 견습생부터 임원까지 오른 인재다. 현재 인텔 고부가가치 데이터센터 사업 분야를 책임지고 있다. 렌두친탈라도 세계 최대 모바일칩 업체 퀄컴 출신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현재 인텔 엔지니어링 부문 책임자로 재임 중이며 최근 제조 분야까지 총괄하고 있다.
누가 됐든 간에 차기 CEO는 인텔이 주도권을 잡은 데이터센터 반도체 사업을 탄탄하게 유지하고, 모바일 기기 시장에 침투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 또 진행 중인 인수 작업을 통합하고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 새롭게 벌여놓은 사업 확장도 완수해야 한다. 인텔은 이날 “승계 과정을 모두 계획해놨으며 내외부 후보자를 포함해 CEO를 물색 중”이라고 밝혔다.
반면 일부 애널리스트들은 인텔이 승계 작업을 명확하게 할 때까지 인텔 주식이 바닥을 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매트 램지 코웬투자은행 애널리스트는 블룸버그에 “크르자니크가 회사를 한바탕 흔들고 가는 바람에 회사에는 승계 계획과 전환 과정이 도전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날 뉴욕증시에서 인텔 주가는 2.4% 급락했다.
인텔은 크르자니크 체제에서 공격적인 확장을 했다. 크르자니크는 인텔의 데이터센터 서버 사업을 구축하고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MS)같이 매년 컴퓨터 클라우드 분야에만 몇십억 달러를 쓰는 기업들에 납품했다. 2015년에는 반도체 소자 제조업에서 선두를 달리던 알테라를 167억 달러(약 18조6000억)에 인수해 인텔 역사상 가장 큰 인수·합병(M&A)을 이뤄내면서 급격하게 성장했다. 크르자니크가 CEO로 있는 동안 인텔 주가는 123% 상승해 S&P500지수 상승폭을 웃돌았다.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매출도 거의 18% 이상 늘었다.
다만 인텔은 삼성전자에 세계 1위 반도체업체 왕좌를 내주는 등 최근 과거의 영광이 퇴색된 상황이다. 올해 초에는 반도체 결함이 발각된 가운데 크르자니크가 이 사실을 알고도 6개월 넘게 은폐한 것으로 전해져 파문도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