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체크리스트

입력 2018-03-07 08:44

  • 작게보기

  • 기본크기

  • 크게보기

‘예, 아니요’로 답하십시오.

성폭력 사건을 선정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 거리로 다뤘습니까? 희롱·폭력이 있었지만 아마 연애 관계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까? 야한 소설을 쓰듯 피해 내용을 상상하고 묘사했습니까? 성폭력은 ‘나 같은 보통 사람’의 일상과 별 상관없는 일입니까? 딸 가진 부모가 특별히 조심해야 하는 범죄입니까? 성폭력을 예방하려면 여성 스스로도 조금은 주의해야 합니까?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안타깝지만 어찌됐든 더럽혀졌습니까? 신문지면 한 귀퉁이에 웅크려 앉아 검게 울고 있는 모습입니까? 피해자는 ‘멍든 꽃’이고 가해자는 ‘악마’라고 쓰면 시적인 제목이 될까요? 때마다 앞세우는 ‘컨트롤타워’ 대책은 어떻습니까? 내부고발자가 계속 회사를 다니게 할 수 있답니까? 고발자가 신분을 감추면 무고한 사람이 마녀사냥 당할 우려가 있다고 봅니까? 성관계는 있었지만 합의가 됐다는 가해자의 말도 ‘공평하게’ 보도해야 합니까? 8년 만의 고백이 뒤늦은 복수심이나 출세,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라고 한 번이라도 의심했습니까? 그 옛날엔 당연한 문화였는데 고소도 못할 일들을 이제와 들추는 게 비겁해보입니까? 대선주자 정도의 거물이라면, 정권의 성패가 달려 있다면, 성폭력 범죄도 공작(工作)의 시각에서 바라봐야 하는 게 언론입니까? 성폭력 가해자의 아내와 딸 근황을 추적하는 게 기자입니까?

숨 막히게 질문해서 미안합니다. 저 역시 묻고 쓰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데 여태껏 한 번도 말과 글로 뱉어본 적 없는 것 같아 몸이 아팠습니다. 숨이 막혔습니다.

딱히 새로운 질문도 아닌데 그렇습니다. 어디서 한번쯤 들어봤을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에 다 있는 겁니다. 갑자기 튀어나와 누구 발목을 날린 지뢰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된 물음이고 투쟁입니다. 대답은 마음속으로만 하셔도 됩니다. 대신, ‘예’가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잠시 숨을 참아보세요. 그러다 딱 죽겠다 싶을 때 뻐끔 쉬는 겁니다. 그렇게들 ‘미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컴컴한 술자리에서 ‘여기자는 이래야 한다’는 투로 기자수첩도 어때야 한다는 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파심에 몇 자 덧붙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나의 현장은 지금 몸담은 언론이자, 아직은 여성으로 통용되는 신체였네요. 이상 기자가 현장에서 수첩에 적은 내용입니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댓글
0 / 300
e스튜디오
많이 본 뉴스
뉴스발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