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143. 이소선(李小仙)

입력 2017-06-2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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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전태일 분신자살후 노동운동에 헌신

이소선(李小仙)은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주개혁에 앞장선 운동가이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全泰壹)의 어머니로 유명하다.

1929년 경북 달성군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일제에 끌려갔다가 사망했다. 이소선은 어머니가 재혼한 뒤 의붓아버지의 구박을 받으며 어렵게 살았다. 일제의 강제 동원으로 일본에 끌려가 노역에 시달리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에 돌아온 이소선은 1947년에 전상수(全相洙)와 결혼했다. 남편은 집에서 미싱으로 옷을 만들어 팔거나 삯일을 했다. 제대로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술주정과 폭력을 일삼았고 몇 달씩 집에 오지 않는 일도 잦았다. 1954년 장마로 원단이 망가져 큰 타격을 입자 가족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이소선은 가족의 생계를 남편에게만 의지할 수 없었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염천교 밑에서 노숙하며 집집마다 동냥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가져온 돈을 밑천 삼아 장사를 시작했다. 행상을 하다가 경찰에 잡혀 경찰서의 유치장에 갇힌 적도 있었다. 경찰이 단속을 심하게 하면 이에 항의해 싸우기도 했다.

억척스럽게 돈을 모은 덕에 천막집을 마련했다. 이 무렵 남편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막집에서 판잣집으로 옮겼고 남대문 시장에 가게도 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해 물건 값을 못 받고 거리로 나앉았다. 남편은 술로 나날을 보냈고 이소선은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지인의 소개로 얻은 셋방마저 월세를 못내 쫓겨난 뒤 용두동 개천가의 천막촌에서 살았다. 이소선은 큰아들 태일이 신문팔이로 번 돈으로 빈 병을 사서 닦은 뒤 되팔았다. 이것으로 보리쌀을 사고 개천에 버려진 무말랭이를 씻어 반찬을 만들었다. 그러나 몸이 허약해 제대로 거동하기가 어려웠다. 전태일은 애틋한 마음을 일기에 적었다. “긴긴 여름날 화로 속같이 뜨거운 천막 안에서 불쌍하기만 한 두 형제를 생각하면서, 이젠 가슴앓이 병마저 생겨 밀치고 올라오는 속을 쓸어내리기 위하여 그 한더위 속에서도 기왓장을 불어 달구어서 배 위에 올려놓고 산송장같이 하루 이틀을 이어나가는 나의 어머니.”

술로 허송세월하던 남편은 1969년에 사망했고, 그 다음 해 큰아들이 분신자살을 했다. “내가 못다 한 일을 이루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이소선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청계피복 노조를 만드는 데 앞장섰고 고문으로 활동했다. 옷 장사를 해 번 돈으로 노동운동가를 돌보았고, 수배자를 숨겨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수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6년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역임했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고문 등을 지냈다. 2011년 9월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은 큰아들 옆에 묻혔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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